올해 100세로 횡성군 둔내면 조항1,2리 통틀어 최고령인 안병기 할아버지는 10여 년 전 원주의료원에서 거의 죽었다고 선고했다. 행여나 해서 기독교병원 응급실로 옮겼는데 심장박동기를 시술해서 겨우 살았다. “3년 전에는 심장박동기 약(건전지)이 떨어져서 수술하고 다시 약을 넣었다”는 안 할아버지는 연세와 달리 정정해 보였다.
할아버지는 읍내까지 농사용 사륜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신다. 이날도 오토바이로 읍내에 다녀오느라 서너 번을 쉬면서 손을 녹이셨다. 65년을 같이 살아온 정연(85) 할머니를 뒤에 태우고 다니다 보니 동네엔 ‘잉꼬부부’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하지만 소문의 진상은 달랐다. 오토바이 뒤에 타신 정 할머니는 새색시처럼 부끄러워 할아버지를 껴안지도 못하신다. 65년을 같이 사셨지만 ‘남 보기 민망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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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연 할머니는 여전히 새색시처럼 부끄러워 하신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껴안은 것은 순전히 ‘연출’이다. 평소에는 ‘남사스러워’ 할아버지를 껴안지 못하고 뒤를 잡으신다. |
횡성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제천에 살던 정 할머니와 결혼했다. 정 할머니는 제천에서 걸어서 안흥고개를 넘어 횡성까지 시집왔다. 새벽부터 밤까지 꼬박 걸렸다. 당시 할머니는 20살.
“행복한 줄 몰랐어. 살기에 급급했으니까 뭐가 뭔지 모르고 산 거야.”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냐는 물음에 할아버지는 난감해했다. 65년을 같이 살았지만 행복을 느끼기엔 삶이 팍팍하셨나 보다.
“1.4후퇴 때 청방(청년방위대) 나가면 군인 나간 거나 마찬가지야. 면에서 뭔 일이 있다고 해서 가면 그냥 거기서 끌려가고 집에는 말도 못해. 밀양 밑에까지 갔다가 병이 나서 다 죽게 돼 돌아왔는데, 집에서는 어디 갔는지도 몰라.” 할아버지는 1951년 1.4후퇴 때 경북 경산과 청도를 거쳐 경남 밀양까지 밀려갔다가 ‘다 죽게 돼서야’ 돌아왔다.
“시체 있으면 얼굴 확인하려고 거적때기 들춰보고 그랬더니 없어. 우리 아버님이 ‘뭘 그렇게 자꾸 들여다보니.’ 그래.” 할머니는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해 시체만 있으면 덮어놓은 가마니를 들쳐가며 얼굴을 확인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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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기·정연 부부는 나이 팔순에 결혼 사진을 찍었다. 결혼 60년 만의 일이다. “아들놈이 찍으라고 해서 마지못해 찍었다”고 했다. |
“(한 사람이) 이래 오는데 얼굴을 쳐다보니까 모르겠어. 가만있는데 등어리에 애를 이래 보면서 ‘어이구 우리 새끼’ 이러는 거야. 그래가지고 ‘옳다구나 애비구나’ 그랬지. 병이 나서 다 죽게 돼서 얼굴이 망가지니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할머니가 크게 웃으시며 회상에 잠긴다.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게 분명하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지. 1.4후퇴 후 돌아와서는 군인들한테 몽둥이로 매도 맞았다구. 요 앞에 방앗간에 피대(벨트)가 우리 집에 와 있으니까 아군(국군)이 와서 ‘곡식을 얼마나 해 먹었냐’ 그래. 우리 아버지가 말 한마디 잘못해서 끌고 가더라고. 그래 산으로 쫓아가니까 왜 쫓아오냐고 그러더라구. 아 여보 당신은 부모가 없수. 부모가 끌려가는데 자식이 집에서 편안히 발 뻗고 있겠느냐고 말이야. 그래서 겨우 아버지를 모셔왔어.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3년 있다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행복했던 기억에 대해서는 쑥스러워 하시더니 어려웠던 고생담은 술술 풀어놓으신다.
“1.4후퇴 나갔다 들어와서 여덟 식구가 옥시기(옥수수) 한 말로 한 달을 살았어. 나물 잔뜩 넣고 옥시기 한 줌 넣고… 국물이 시퍼런 게 나물만 가지고 산 거야. 이 동네에 40호가 넘게 살았는데 지금은 집이 없어. 포격 당해서 집이 다 망가지고, ‘쾅’하면 집이 무너질 것 같아. 이 너머도 뭐 하나 떨어져서 산이 홀라당 다 탔어. 아침에 보면 저 개울가에 시체가 넘쳐나고, 사람들이 시체를 둘둘 싸서 메고 가는 거야. 인민군이나 아군이나 그렇게 시체가 나가더라고. 그 많은 걸 어디다 다 끌어 묻었을까 그랬어.”
“왜정(일제 강점기) 때는 배급 타다 먹느라고 힘들었지. 왜정 때는 농사를 져도 쌀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뭐. 일본놈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데, 한국 놈이 일본 놈 끌어들이고 일본 놈 쫓아다녀 놓고… 일본 사람보다 글 좀 배웠다고 앞잡이 한 놈들이 더 미워.”
그렇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넘긴 두 분은 ‘자유당 말기’(50년대 후반) 할머니가 복막염을 앓자 ‘객지 물 먹으면 낫는다’고 해서 무작정 원주로 갔다. 며칠 묵으려고 했던 게 50년을 머물다 10여 년 전 다시 고향 횡성으로 돌아왔다.
큰아들은 딸 하나 낳고 10여 년 전 간암으로 아비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올해 환갑인 작은 아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양복 기술 배워서 살다가 지금은 골프장에서 허드렛일을 한다.
“나 사는 걸 얘기하면 소설 몇 권은 돼.” 안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신다. 짧은 지면에 100년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 소개할 수 있을까. 기자가 아니라 소설가가 왔어야 했다.
이상규 기자 eco2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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