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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영철 교수 |
경주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코스였다. 필자도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5년에 경주를 다녀왔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여 년이 흘렀다. 흐르는 강물을 막을 수 없듯이, 무정한 세월은 야속하게만 흘러간다.
10월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한글날 새벽, 잠에서 깨어난 필자는 친구들과의 2박 3일 일정으로 경주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숙소를 예약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번 연휴도 숙소 예약이 쉽지는 않았지만,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경주에서 제법 떨어진 청도에 있는 글램핑장을 예약할 수 있었다.
일행을 태운 차는 9일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서야 경주 시내로 들어섰다. 불국사 가까운 식당에서 밀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일행은 불국사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어서 하는 수 없이 불국사 식당가 골목에 차를 쉬게 하였다. 예상은 하였지만 불국사는 오전부터 인산인해였다. 연휴를 맞아 이곳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경주는 예나 지금이나 국제도시로서 부족함이 없다.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불국사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 574년에는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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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석가탑이 삼층석탑의 완성된 조형미를 보여준다면, 다보탑은 예술성이 가미되어서 그런지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
불국사 경내에 들어서자, 다보탑과 석가탑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석가탑은 삼층석탑의 완성된 조형미를 보여준다. 다보탑은 예술성이 가미되어서 그런지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불국사의 랜드마크인 석탑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석탑을 지을 생각을 했는지 도저히 석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백제의 미가 우아함에 있고 신라의 미가 화려함에 있다고 했는데, 다보탑이야말로 화려함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높이도 비슷하게 각각 10.29m, 10.75m인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나저나 다보탑 기단 돌계단에 앉아 있는 돌사자 한 마리가 외로워 보였다. 일제가 약탈해 간 나머지 3마리는 언제쯤 제 자리로 돌아올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불국사를 빠져나온 일행은 두 번째 답사지인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갔다. 감포가도를 달리던 차가 황금 들녘으로 물든 한적한 곳에 이르자, 감은사터 쌍탑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 말로만 듣던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직접 보게 되니 가슴이 설레었다. 중국의 탑이 전탑이고, 일본의 탑이 목탑이라면, 우리나라는 화강암의 나라답게 석탑 양식을 발전시켰다고 들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이제껏 보아온 삼층석탑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압도적이었다.
감은사지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감은사는 동해에서 신라 수도 경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에 세워진 절로, 예전에는 이곳에 삼층석탑 2기와 금당, 강당 등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삼층석탑과 건물터만 남아 있다. 신라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에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감은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문무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인 신문왕이 682년에 절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유홍준 교수에 따르면, 익산 미륵사터에 남아 있는 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이것은 돌로 지어진 목조건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간소화시킨 것이 부여에 있는 정림사터 오층석탑이라면, 신라인들은 오층석탑을 모방하되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감은사에 삼층석탑을 세웠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을까?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새 국가의 건설에 걸맞은 장중하고도 힘이 느껴지는 석탑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총높이 13미터(상륜부 고리인 쇠꼬챙이를 포함)에 달하는 감은사 삼층석탑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튼실한 이중 기단을 통해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시킨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석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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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은사 삼층석탑은 튼실한 이중 기단을 통해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충족시킨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
경주는 시간여행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최적의 장소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군데군데 파손된 흔적이 그대로 남았는데, 세월의 지문을 느낄 수 있었다.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내 달라.”라고 유언했다. 그 뜻을 받들어 장사 지낸 곳이 대왕암이다.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받들어 감은사(感恩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삼국유사』 만파식적조). 이곳에 와보니 감은사가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이자 호국사찰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감상한 일행은 가까운 감포로 차를 몰아갔다. 바닷가에서 차 한 잔의 여유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바다는 힐링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불국사에서 번잡함을 느낀 일행은 폐사지인 감은사지에서는 고요함을 경험하였고, 그리고 감포 해변에 이르러서는 쉼을 얻었다.
감포를 떠난 일행은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로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경주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사실은 이곳 첨성대에 와서 느낄 수 있었다. 주차장에는 차를 댈 수 없었기에 필자만 무리와 헤어져 첨성대로 걸어갔다. 신라의 정치와 문화, 과학의 중심지였던 월성지구는 수많은 사람들로 꽉 찼다. 40여 년 전, 수학여행 때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간 첨성대는 변함없이 우뚝 서 있었다. 신라시대의 모든 목조건축물이 사라졌지만, 돌로 쌓은 첨성대만은 천년고도의 상징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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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는 전체 모양이 탑(塔)이나 옥(屋)이 아닌 대(臺)라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
신라 사람들은 왜 첨성대를 쌓았을까? 첨성대는 전체 모양이 탑(塔)이나 옥(屋)이 아닌 대(臺)라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첨성대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했던 곳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첨성대의 형태미와 곡선은 웅장하기보다는 아담하기에 친숙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10월의 어느 가을밤에, 조명에 비친 환상적인 첨성대를 감상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으리라.
경주 월성지구에는 첨성대 외에도 동궁과 월지라는 명소가 있다. 달빛이 내려앉은 월지를 바라보며 동궁에 머물던 신라의 왕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어야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이건만, 현실에 매여 사는 현대인과 달리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자 했던 신라인들이 마냥 부러울 따름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긴 데서 유래한 월성은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불리었다. 신라의 역대 왕들은 월성에 머물며 정사를 펼쳤다. 해자와 이웃한 길을 따라 걷노라니 저 멀리 인왕동 고분군이 넓은 평지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천 년을 넘어서까지 자리를 보존하는 것을 보니 명당이 아닐 수 없다. 경주에는 몇 기의 고분이 있는지 정확한 숫자를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경주 시내에는 155개의 고분이 있다.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신라인들은 화려함을 숭상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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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동 고분군은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천 년을 넘어서까지 자리를 보존하는 것을 보니 명당이 아닐 수 없다. |
천년고도 경주는 중국의 시안과 일본의 교토를 잇는 국제도시였다. 저 멀리 그리스에서 출발한 실크로드 문명은 시안을 거쳐 경주에 전해졌다. 이는 다시 일본의 교토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인 경주는 여전히 신비로움을 간직한 채 가을에 물들고 있다. 경주의 끝자락을 경험한 필자는 그 옛날의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처럼 이 도시가 점점 궁금해진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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