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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포스터 |
텔레비전, 컴퓨터, 냉장고를 비롯한 온갖 가전제품을 소비자의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말해오지 않았던가. 하물며 귀하디 귀한 사람인데, 어디 냉장고나 컴퓨터에 비하겠는가. 그들이 정당을 만들었다면 아버지는 기꺼이 그 당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다행히(.) 가전제품을 만들고, 초일류를 강조했으므로 아버지는 열심히 딸이 속해있는 그 회사의 제품을 사며 ‘또 하나의 가족’으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2014년 “또 하나의 약속”은 거대 기업의 가족주의로 포장된 ‘새빨간 거짓말’을 믿어버린 순진함과, 기업은 완벽하므로 문제가 있다면 그건 그 개인일 뿐이라는 교묘한 논리에 순응해온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들이 만든 제품들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 부르도록 세뇌시키며, 팔만 뻗으면 닿을 곳에 무수한 그 또 하나의 가족들이 채워질 동안, 진짜 가족은 딸을 잃고, 남편을 잃고, 아버지를 잃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 다니던 딸이 2년만에 백혈병을 얻어 돌아왔다. 회사는 위로금(그것도 직원들이 모아준)을 내밀면서 사직서를 쓰도록 하되 단 산재보험은 신청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아버지는 처음엔 직접 찾아와준 이들의 정성이 고맙기까지 했다. 딸의 병은 그저 딸 아이 개인의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산재보험은 적어도 국가가 보장하는 권리 아닌가. 없는 형편에 딸의 병원비는 현실적인 부담이 되고, 당초 보험신청을 안하겠다는 회사와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다.
국가도 회사와 다르지 않았다. 산재보험은 질병과 작업환경과의 관계성을 입증해야할 책임을 신청인인 노동자에게 두고 있었다. 이로 인해 회사는 쉽게 불인정 판정을 받았다. 아버지는 또 다시 거리로 나선다. 한때 든든한 동아줄이라고 생각하며 수첩에 적은 전화번호들은 점점 줄이 그어지고, 이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 노무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녀의 정의감도 거대 회사와의 싸움을 선뜻 선택하지 못한다. 회사의 책임을 입증할 수 없는, 입증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막혀있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딸은 아버지의 차에서 싸늘하게 죽어간다.
아버지는 딸을 그렇게 보낼 수 없었다. 이제 돈이 있어도 나을 수 없고, 살아올 수 없는 딸이지만 적어도 딸의 명예는 지키겠다는 약속을, 아버지는 감히 대기업을 앞에 놓고 다짐한다. 2011년 6년 싸움 끝에 딸의 백혈병과 업무 간의 인과관계를 인정받았다. 쾌거이고 감격스러운 순간이지만,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는 2010년 가을에 춘천에서 실화의 주인공인 황상기씨와 반올림을 만난 일이 있다. 딸인 유미씨는 이미 고인이 된 다음이었고, 아버지 황상기씨는 속초와 서울을 넘나들면서 여전히 삼성과 전쟁 중이었다. 특별한 투사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사상적으로 붉은 분은 더욱 아니었다. 그냥… 아버지였다. 그저 살아있는 딸아이의 웃음을 다시 보고 싶고, 그 목소리를 듣고 싶은…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딸들과 아들들은 살려야하겠다는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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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중 한 장면 |
삼성공화국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어쩌면 이리도 슬프게 낯설지 않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내게 영화 속 삼성의 횡포는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았다. 삼성의 그 놀라운 권력과 교묘한 속임수는 그토록 분노스럽지도 않았다. 같이 영화를 본 조카는 자신의 낡은 핸드폰이 삼성이 아니라 참 다행이라고도 했는데, 다른 회사 제품이라도 네 전화기나 컴퓨터 안에 쓰인 아주 작은 반도체 칩들 가운데는 삼성 로고가 있을 것임을… 또박또박 알려주지도 못했다.
무수한 삼성들이 우리나라에 있다. 쌍용자동차, 용산참사, 밀양송전탑과 제주 강정마을, 가까이는 홍천의 구만리 등.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권력의 폭력도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국가권력, 기업의 권력을 공고히 해주는 것은 바로 지식권력이다. 영혼을 팔고, 마음을 버리고 권력의 시녀가 되어가고 있는 법조계와 지식의 사용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고민하지 않고 채워 넣기만 했던 심장 없는 지식인들이 바로 무수한 삼성을 버텨 주고 있는 것이다.
삼성이 얼굴을 직접 드러낸 일은 없으나, 법정에서 법 위에, 국민 위에 군림하였으며, 그것에 순응하고 기꺼이 영혼을 내준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무서운 것은 삼성의 자명한 패악이 아니라 이 부당함을 은폐하고, 진실을 막아버린 법정 속 그들, 황상기씨의 호소에는 귀막고, 삼성의 광고에는 온몸과 마음을 열어버린 언론사들이었다.
오늘도 우리의 아이들이 공부를 한다. 지식의 쓰임과 해석에 대해 누구도 깊이 있게 성찰해주지 않는 교실에서 자란 아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히틀러의 나찌당 의사, 연구자, 교수들처럼 무수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인도할 이도 나올 것이며, 오늘 저 법정의 법관이나 검사, 변호사들처럼 양심을 버리고 주머니를 채우는 이들도 나올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삼성 자체보다, 독재자 자체보다 두렵다. 그런 무감각이 무감각하게 전염될 것이 무섭다.
영화가 끝나고 크라우드 펀딩으로 영화의 제작을 도운 이들의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아는 이름이 보여 반갑고 동시에 미안했다. 집에 돌아와 페이스북에 떠있던 ‘탐욕의 제국-삼성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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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소영 교수(송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
나와 같은 평범한 이들이 이제 무수한 황상기씨를 잊지 않는다는 또 다른 약속이 필요한 때라고, 올바른 기억과 연대만이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그럴 때만이 자본과 지식의 결합, 자본과 정치의 결합으로 만들어내는 기형적인 권력을 견제할 수 있다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에게 또 하나의 약속을 해줄 것이라고…
허소영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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