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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업실에서 만난 서성덕 작가 |
횡성군 강림면 강림4리의 ‘횡성예술촌’은 횡성출신이면서 현대도예가로 잘 알려진 서성덕 작가가 10년 넘게 작품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실내에는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다양한 서 작가의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문외한의 눈에도 전통 도자기들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30여 년째, 흙과 함께 살아가는 서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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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성예술촌에서는 도예와 염색 등 다양한 체험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
해외문화의 접목, 그러면서도 한국적 색깔을 잃지 않는 현대도예
“60, 70년대부터 현대도예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대학에 도예 전문과정이 생기면서 세계적으로 다양한 도자기들을 접목하게 되고, 그것을 현대도예라고 부르게 됐어요. 백자, 청자 같은 전통 자기는 ‘기’형태(둥근 형태)로 되어 있어요. 현대도예는 깎아내고 덧붙이고 형태에 제한이 없어요. 다양한 거죠.”
그렇다고 해서 현대도예에서 한국적 색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각 나라마다 문화적 기틀은 있으니까, 똑같은 흙과 안료, 유약을 써도 각각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도자기의 시선들이 다 다릅니다.”
지역사회와 ‘문화’를 나누려던 다양한 시도들
서성덕 작가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2003년. 시골과 고향을 좋아하던 그 앞에 마침 폐교가 하나 생긴 것이 큰 계기가 됐다. 당초 도자기를 굽기 위해 <예술촌>을 시작했는데, 예술체험교육도 병행하게 됐단다.
“제가 하는 일을 설명하고 알리려고 체험교육도 하게 됐어요. 집사람이 한복을 하고 있어서, 천연염색도 접목하고 다도예절교육도 같이 하고. 횡성예술촌은 문화예술의 교육공간이에요.”
‘횡성예술촌’에는 방문객이 계속 찾아온다. 횡성 관내에서는 1년에 두세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찾고, 주로 수도권에서 가족단위로 찾아와 외지 방문객이 두 배 이상 많다고 한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넘는 기간, 고향으로 돌아온 뒤의 생활을 돌아봤다.
“처음에는 다들 의욕적으로 많은 일을 벌이고, 새로운 것도 많이 반영시키려고 하죠. 저도 그렇게 해왔고. 제가 들어오던 시기부터 문화공모사업이 시작돼서 문화관광부 지원으로 벽지아동들이나 정신지체장애우들, 다문화가정들 대상으로 도자기교육을 했어요.”
5년 정도 그렇게 하던 그는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생활인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강림지역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게 있어, 장작가마축제라는 일을 벌였다. 2008년에 시작한 가마축제는 2010년까지 이어졌다.
“처음에는 도자기 장작가마불을 때고 작은 음악회를 하면서, 1년 동안 알고 지냈던 분들과 회포를 풀려고 시작했어요. 서울에서 통기타 가수들이 내려와서 기꺼이 도와주시기도 하고. 한 50명 정도가 참여했었는데 소문이 나면서 인원이 점점 늘어나는 거에요. 2010년도에는 군에서 돈을 지원하고 ‘크게 한번 해보라’고 했는데, 600명 가까운 인원이 왔어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점점 커지자 회의를 느끼게 됐다고 한다.
“작게 하더라도 알차게 하고 싶었어요. 나 혼자 보여주지 못했던 거를 다른 도예가나 공예가를 불러서 더 많은 체험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었는데, 무대도 설치해야 하고 공기관과 협력도 되어야 하고 이러다보니까 제 생각과는 동떨어진 축제로 변모되더라구요. 마침 다음해 군수님이 교체되면서 지원도 끊겼죠. 이참에 ‘잘 됐다. 안 하는 게 낫겠다’ 했죠.”
그러나 지금 서 작가는 ‘장작가마축제’를 다시 해보고 싶어 한다. “작고 알차게.”
문화예술 향유하는 법,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서 작가는 매우 바쁘다. 1년에 세 차례, 평균 보름씩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갤러리를 이용해 작품전시를 한다. 상지대학교 겸임교수로 사흘씩 출강하는 것 외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횡성의 ‘고른기회배움터’ 학생들에게 도자기교육을 해주고 있다. 2007년 만들어진 횡성미술협회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한국미술협회 입회의 기준이 되는 인원수(정회원 15명)에 못 미쳐 한국미술협회에 등록되지 못했는데 올해 3월 입회신청을 한다고 했다. 그동안 작가로 데뷔한 횡성지역 미술인들이 늘어 ‘한국미술협회 횡성군지부’ 등록이 가능하다고 한다.
“미술협회의 공식조직이 되면, 1년에 한 번씩은 꼭 공동전시회를 해야 되요. 원주나 서울에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보기 힘든 것들을 보여줄 수 있고, 그만큼 횡성인들이 미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는 거죠.”
그런데 ‘예술이 밥 먹여 주냐.’는 말들을 한다. 예술은 그저 도회지의 여유로운 계층들이 향유하는 장식품쯤 되는 건 아닐까.
“예술. 누구한테 물어보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그거 없어도 살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집안 한 공간에 그림이 걸려있고 그걸 바라보면서 행복할 수 있는 거에요. 소득이 어느 정도 되면 사람들이 갈구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일은 문화적인 요소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그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문화를 소비하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어릴 때부터의 문화예술교육이 중요하다고 한다.
“문화예술에 접근하는 방법은 한순간에 체득되는 게 아니어서 교육이 중요해요. 어려서부터 체험과 교육을 통해서 조금씩 ‘문화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고 만들어갈 수 있는 준비된 자세를 가르쳐줘야 해요. 그래야만 성인이 됐을 때, 문화라는 부분을 스스로 끌고 갈 수 있는 거고,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거에요.”
대도시에 비해 횡성에서는 문화에 대한 인식을 키워줄만한 바탕이 너무 약하다며 횡성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해 쓴 소리를 날렸다.
“횡성은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비율도 너무 낮고 이해하려고 하는 폭도 너무 좁아요. 문화예술공원 짓고, 횡성군청 로비를 갤러리로 개방하긴 했지만, 다른 시군에 비하면 매우 부족합니다. 횡성의 문화예술정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실 잘 몰라요. 군민들하고 (정책이) 공유되어야 어디서부터 고쳐나갈지 방향을 잡을 텐데,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하는 걸 따라가요. 예전에 제가 버스정류장들에 그림을 그려보자고 했어요. 마을마다 고유한 전통문화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걸 잊혀지지 않게 해보자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구요.”
서 작가는 “풍수원 쪽에서 옹기가 무지하게 많이 만들어졌었다”며 ‘풍수원성당의 옹기’ 이야기를 꺼냈다.
과거 천주교신자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선교와 신앙활동을 위해 항아리를 제작했는데 박해를 피하기 위해 남들이 못 알아보도록 새의 모습처럼 십자가를 새기는 등 몰래몰래 그 전통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전통의 명맥이 끊어졌다.
“도자기를 횡성에서 다시 활성화시킬 부분이 있어요. 지역에 나이 드신 분들은 알고 계실 거에요. 있었던 것도 우리가 못 찾으면 바보죠.”
해마다 옹기축제가 열리는 울산에서 횡성의 옹기를 수집해 갔다고도 한다.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자산이라면, 이를 되살리려는 노력도 가치 있는 일일 게다.
“정말 재밌어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해요”
서 작가는 도자기 굽는 일이 정말 재미있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말한다.
“과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내가 만들었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라, 불을 통해서 작품이 완성되거든요. 불꽃의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지나가느냐에 따라서 다른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요. 그것이 내가 원하는 작품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순간은 저만이 가질 수 있는 희열이죠. 그 희열 때문에 재밌고, 계속해서 탄생의 순간을 맛볼 수 있으니까 행복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제가 도자기 한지 30년 가까이 되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껴요. 정말 해야될 게 너무 많아요. 흙과 유약의 종류도 다양하고, 흙과 유약이 어떤 차이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태어나는 게 다 다르니까, 그런 거를 죽을 때까지 하나씩 맞춰나가는 거죠.”
도예는 흙으로 만드는 예술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흙을 가지고 놀았던 좋은 추억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도예는 우리와 가까이 있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매력적인 작업이다. 이것이 서성덕 작가에게서 들은 ‘도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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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성덕 작가의 가마. 장작을 넣고 불을 때고 1250도 이상의 온도에서 흙을 익히고 나면 자기들이 태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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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 작가의 작품들. 다양한 형태와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도예 작품들이다. |
이창조 기자 redfrog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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