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여성농업인센터 토종씨앗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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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궁째 말린 꽈리열매. 감기에 걸렸을 때 다른 약재와 함께 차로 달여 먹는다. |
어르신들은 당신이 살아온 얘기를 풀어놓으면 소설책 몇 권은 될 거라는 말씀을 흔히 하신다. 맨 몸으로 전쟁과 가난을 이겨내신 70~80대 분들이니, 굽이굽이 겪은 일들이 소설보다 많으실 게다. 공근면 오산리에 사시는 김갑순 할머니(82세)께 토종씨앗 ‘꽈리’를 보러 갔다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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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갑순 할머니(공근면 오산리, 82) |
할머니는 원주 지정면 안창리에서 22살에 횡성군 공근면 오산리로 시집을 왔다.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가 계셨고, 시동생 넷에 남편은 장남이었다. 논이 열댓 마지기에 밭 천 평이 있었지만 점심도 잘 못 먹었다고 했다.
“그때는 수확을 많이 못해서 못살았지. 나는 시집오던 날부터 사뭇 일했지. 옛날에 우리 살적에는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읍에 갈 때 새벽 다섯 시에 나가 저자를 봐. 콩이랑 쌀을 이고 저 동막골로 걸어서 굴다리로 빠져서 지금 공근 장례식장 있는 데로 나와서 장엘 다녔으니까. 10리도 넘었지. 서 말씩 막 이고 가지. 그래서 골병이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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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종농사를 짓는 할머니들은 모두 한 가지 이상의 토종콩종자를 갖고 계신다. 김갑순 할머니가 보여주신 호랑무늬줄콩. 울타리에 심어 울타리콩이라고도 한다. |
서른 대여섯부터 오십 전까지 그렇게 장에 나가 쌀과 콩을 팔아서 살았다. 오십 무렵 통일벼가 나와 생산량이 두 배로 되면서 밥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집 앞으로 신작로길이 생기고 공근면 사무소 앞으로 읍내 가는 도로가 났다. 그때부터는 남편이 그 길을 따라 경운기를 끌고 장에 다녔다.
결혼해서부터 오래도록 심었던 대표적인 작물은 쌀, 콩(토종 장콩), 속퍼런콩, 보리, 밀, 자주감자라고 했다. 서리태보다 맛은 덜했지만 껍질과 속이 푸른색인 속퍼런콩을 심어 밥에 놔먹었다. 감자도 눈이 많고 깎기 어려웠던 자주감자를 심었다.
보리와 밀은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꼭 있어야 했던 작물이었다. 8월이나 9월에 심어 가을에 싹이 올라오면 퍼런 채 죽어 있다가 초봄에 살아났다. 5월이 지나면 수확을 해서 여름 석달을 쌀 대신 식량으로 먹었다. 수입밀에 밀려난 국산밀 그리고 흰쌀밥이 주식이 되면서 빠져나간 보리 이야기를 들으니 어르신들은 보릿고개의 고달픔이 떠오르겠지만, 내게는 토종종자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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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꽈리뿌리. 서리가 내리기 전에 베어 말렸다가 봄에 심는다. |
시댁 어른을 모시고, 시동생들 결혼시키고, 농사지어 돈을 만드느라, 너무 고생을 해서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가지 않겠다는 할머니. 그래도 한때는 농사를 지어 돈을 많이 벌었던 적도 있었다 한다.
마흔 다섯부터 20년 동안은 고추농사가 그랬다. 남들보다 먼저 비닐하우스를 지어 고추모를 내었고, 하우스 안에서 고추 말리는 걸 배웠다. 장에 나가면 고추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모를 하우스에서 내고 노지에 심는 고추는 고추농사가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라 농약을 뿌리지도 않았고 병충해도 없었다. 남쪽에서 온 이웃에게 하우스이용법을 배운 것인데, 농업기술센터에서도 와서 보고 갔다고 했다. 지금이야 모두 하우스에서 고추모를 내고, 고추를 말리지만, 30여년 년 전에는 신기술이었던 게다. 고추와 함께 10년쯤 심었던 맥주의 원료인 호프꽃도 따박따박 수입이 좋게 들어왔다. 그 덕에 네 자녀 중에 아들 둘은 대학까지 가르칠 수 있었다.
머리를 써서 고추농사를 지어 돈을 벌었다는 할머니는, 팔순 연세에도 기억력이 좋아 농사지어온 이력을 차근차근 말씀해주셨다. 이제는 논밭은 모두 남을 주고, 집 뒤의 텃밭에서 할아버지가 들깨와 참깨, 고추, 감자, 고구마 정도의 부식거리만 조금씩 심는다고 한다. 할머니가 갖고 계신 씨앗 중에 ‘꽈리’가 있었다. 감기에 다려먹으려고 일부러 얻어다 심어놓으신 거였다.
“지금쯤 뿌리를 심으면 싹이 나와 번지지. 7월이 되면 뻘겋게 익고 서리오기 전에 비어 응달에 매달아 놓으면 마르지. 겨울에도 그 안에 씨는 얼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있더라고. 이파리(잎)랑, 열매 째 몇 대궁 넣어가지고 대추, 밤, 생강 넣고 푹 삶아먹지. 기침할 때 열날 때 차 삼아 먹으면 감기가 낫더라구.”
할머니가 찬바람을 맞으시며 캐주시는 꽈리뿌리와 광에 말려둔 꽈리를 세 대궁 얻었다. 한평생 늙도록 농사꾼으로 살며 심어왔던 씨앗과 농사지어온 이야기들은 꽈리보다 더 소중한 선물보따리였다.
‘할머니, 바람 부는 날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감기 걸리지 마세요. 할머니가 주신 꽈리는 잘 심어서 오래오래 키워볼게요.’
횡성여성농업인센터 토종씨앗지킴이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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