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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조선 전기에는 이황과 이이가 있어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면, 조선 후기는 정약용과 박지원이 있어 실학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성리학이 세상을 구제할 힘이 다하였을 때, 이 땅의 군주와 신하들은 한 마음으로 대동(大同) 세상을 꿈꾸었다. 정조가 만든 신도시 수원화성은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왕과 신하들의 합작품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있었다.
다산은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 마을이다. 다산이 태어난 이곳은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라 할 수 있다. 다산의 묘에서 바라보면 북한강과 남한강은 이곳 두물머리에서 합류해 한강으로 도도히 흐르다가 서해로 빠져나간다. 한강의 운명처럼 다산은 성리학과 실학을 하나로 모아 조선을 발전시킬 토대를 만들었고,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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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초상 |
그러나 다산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답사 일행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마현 마을을 찾아간다. 이미 여러 차례 이곳을 다녀갔지만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인간 정약용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학자로서의 다산은 이 짧은 글에서는 도저히 다룰 수 없을 만큼 다방면에 걸쳐 온갖 방책을 강구하여 5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지금도 다산학이라 하여 많은 연구자들이 논문과 책을 통해 다산을 조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유배지에서 쓴 다산의 글을 중심으로 인간적인 정약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자들을 태운 나의 애마는 팔당댐을 지나 다산 정약용 생가로 향하였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내린 일행은 먼저 다산문화관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다산이 남긴 대표적인 저서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대에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놀라운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까?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는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란 책에서 그 비밀을 밝힌 바 있다. 그 비밀이란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 동안 다산이 자신의 제자를 길러 공저로 저술한 데 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 다산을 존경했던 후학들이 정약용의 저서를 수집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신조선사, 1934년)을 간행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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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노자의 도덕경 15장의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은 정약용의 호이자 정약용 생가의 이름이다) |
다산은 주지하다시피 정조의 어명을 받아 배다리를 만들었고 수원화성을 설계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신하에서 폐족의 가장이 된 것이다. 다산뿐만 아니라 다산의 가문은 신유년(1801, 순조1)에 너무도 길고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셋째 형 정약종의 사형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그해 10월 황서영 백서(帛書) 사건(조선 천주교 탄압의 전말을 담은 편지를 중국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 전하다 발각된 사건)으로 인해 또다시 한양으로 압송된 다산은 정약전과 함께 국문(鞫問)을 받았다. 다행히 태비(太妃)의 특지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다산은 강진으로 귀양을 갔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다산은 유배지였던 강진에서 18년간 머물면서 불후의 대작을 남겼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항상 생각하며 시를 쓰고 편지를 보냈다. 다산의 편지에는 그의 강직한 모습과 달리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자상한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 다산의 아내는 명문가의 외동딸인 홍혜완(洪惠婉)으로, 다산과 함께 60년의 풍상과 영욕을 함께 했다. 다산이 귀양을 가 있는 동안 다산의 아내는 마재에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건사했다. 혼인한 지 30년이 되는 1806년에 홍혜완은 시를 담은 편지와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강진으로 보냈다.
눈서리 찬 기운에 수심만 더욱 깊어지고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며
그대와 이별 칠 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 - 홍혜완
홍혜완의 시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마재와 해남의 거리만큼 그들의 사랑은 깊고도 넓었다. 다산은 1810년에 부인이 보내온 치마를 자르고 마름질하여 두 아들에게 경계하는 글을 써서 보냈다. 이것이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다산의 ‘하피첩(霞帔帖)’이다. 하피란 본래 궁궐에서 비(妃)나 빈(嬪)이 입던 치마를 지칭하며, 민간에서는 하피란 말 대신 여인들이 입는 붉은색 치마인 ‘홍군(紅裙)’이라 불렀다. 다산은 홍군이란 말에 기생이라는 뜻도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하피란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홍동현,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생활과 <하피첩>」) 하피첩은 4첩 중에 3첩만이 현재 전해지고 있으며, 총 46매로 되어 있다.
다산은 하피첩 서문에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고, 손길 따라 훈계의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준다. 훗날 이 책을 읽고 감회를 일으켜 부모의 향기로운 은택을 떠올린다면 뭉클한 마음이 절로 일어날 것이다.”라고 적었다. 하피첩의 주된 내용은 집안의 화목과 결속을 다룬 1첩,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근검하게 살 것을 당부하는 2첩, 자신의 학문을 계승해 줄 것을 당부하는 3첩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1첩의 일부 내용을 요약하자면, “형제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고 그 형제끼리 우애하는 사람쯤이야 세상에 많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는 도타운 행실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백부·숙부로서 형제의 아들을 자기 아들과 같이 여기고 형제의 아들들이 백부·숙부를 친아버지처럼 여겨” 다른 사람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사대부 집안의 기상이라 하였다. 이 글은 폐족이 되어버린 두 아들의 처세를 훈계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새겨들어야 할 격언이라 할 것이다.
1812년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에게 외동딸이 어느덧 숙녀가 되어 강진을 찾아왔다. 강진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 윤서유 집안으로 외동딸이 시집을 온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시집 온 딸은 1813년 남편과 함께 고향 마재로 가게 되었다. 이별이 못내 아쉬웠던 다산은 하피첩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여백에다 시를 적어 시집간 딸에게 건네주었다.
翩翩飛鳥息我庭梅 포롱포롱 날아온 새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有烈其芳惠然其來 꽃 향기 짙으니 그래서 찾아왔겠지
爰止爰棲樂爾家室 여기 머물고 깃들어 내 집안을 즐겁게 하려무나
華之旣榮有賁其實 이제 꽃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달릴거야!
- 매화병제도(梅畵屛題圖), (『동백꽃은 지고 봄은 오고』,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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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여름의 햇살을 등진 느티나무가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을 감싸고 있어 한적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
다산이 유배지인 강진에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슬픔은 1802년에 있었던 막내 아들 농아의 죽음이었다. 다산과 홍혜완 사이에는 6남 3녀가 있었으나 농아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4남 2녀는 요절하였고 2남 1녀만이 살아남았다. 다산의 막내아들 농아는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나의 홍역이 낫고,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천연두가 곧 나을 것이다,”라며 다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농아는 죽는 순간까지 다산을 보지 못하고 3년을 겨우 넘긴 날에 생을 마감했다. 다산은 이때 농아의 영혼을 위로하면서도 아내를 염려하는 서찰을 두 아들에게 보냈다. “너희 어머니가 목숨을 의탁하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은 오직 그 아이뿐이었는데, 더구나 큰 병을 앓아서 점점 수척해진 뒤에 이러한 일을 당하였으니 하루 이틀 사이에 따라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이 글에는 다산이 비통한 심정을 누르고 병든 아내를 걱정하는 부정(夫情)이 느껴진다.
답사 일행은 다산의 묘지를 방문하여 다산을 추모하는 묵념을 드렸다. 아내와 합장한 다산의 묘는 얕은 언덕에 조성되어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초여름의 신선한 풀내음이 섞인 다산의 묘지를 뒤로 하고 답사객들은 여유당(與猶堂)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배된 다산은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인생의 말년을 보냈다. 그런 어느 날 75세의 정약용은 아내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혼례 당일 별세하였다. 다산은 60년을 함께 한 아내에게, “육십 년 풍상의 바뀌 순식간에 흘러갔는데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시절 같구려(…) 갈라졌다 다시 합한 게 참으로 나의 모양이니 두 합환주 잔 남겨서 자손에게 물려주리라”라는 시를 바쳤다. 죽는 순간까지 생의 모범을 보인 다산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아닐 수 없다.
여유당을 나온 답사 일행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산생태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무심한 강물은 오늘도 변함없이 아래로 흐른다. 다산이 가고 없는 자리에 그의 책은 남아 후학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말로만 듣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사서 읽어보려 한다. 그것만이 혼탁한 시대를 맑게 하고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희망의 길이기에.
음영철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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