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매미 울음소리가 세차게 울리는 8월 중순의 어느 날, 나의 애마는 성북동 길상사로 달려간다. 극락전 앞마당에 꽃무릇이 피는 가을에 가야 제격이지만 더위가 푹푹 찌는 날을 일부러 택한 것은 어쩌면 백석과 자야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첫사랑의 아픈 추억이 기억의 저편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길상사는 한 번은 가봐도 좋을 것이다. 이곳에 가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뜻하는 꽃무릇의 꽃말처럼 분단으로 헤어져 살아야만 했던 시인과 기생의 슬픈 연가를 들을 수 있다.
![]() |
| 뜨거운 여름 햇살이 푹푹 내려서인지 길상사에는 인적이 드물다 |
자야(본명 김영한)라 불리는 이 여인은 우연히 『무소유』(법정 지음)를 읽고서, 1000억 원대의 대원각을 부처님께 시주하였다.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자야는 “1000억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때 기생이었던 자야와 시인 백석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담겨있는 것일까?
자야가 사랑한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김소월을 동경한 백석은 소설로 등단하였으나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백석 시인은 오산고보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0년에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어사범과에 입학했다. 유학 중에는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石川啄木)를 사숙(私淑)하여 자신의 성에다 석(石)이라는 이름을 붙여 백석(白石)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본명은 백기행(白蘷行)이다.
![]() |
| 정장을 입고 종로를 거닐던 모던보이 백석은 지금도 여전히 꽃미남이다 |
백석은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1934년에 귀국하였다. 그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더 이상 정주 촌놈이 아닌 양복 차림에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 조선의 모던보이였다. 목이 유난히 긴 백석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멋쟁이 청년이었다. 길 가던 여성들이 종로에서 백석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곁눈질을 할 정도로 그는 뭇 여성들의 호감을 샀다. 훤칠한 키에 꽃미남형인 백석은 1950년대 댄디보이 박인환과 쌍벽을 이룰 만큼 이목구비가 뚜렷하였다. 그는 늘 정장 차림으로 광화문과 세종로를 바쁘게 걸어다녔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문인 F4에 임화, 백석, 윤동주, 황순원을 손꼽는데 백석은 맨 앞이 아닐까 싶다.
백석은 미남이기도 했지만 시를 참 잘 썼다. 그가 1936년에 발표한 『사슴』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을 만큼 빼어나게 아름다운 시집이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구할 수가 없어 도서관에서 이 시집에 담긴 33편을 손수 베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나오는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같은 시어들은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를 오마주한 것이리라.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백석의 <모닥불>을 읽은 안도현은 백석을 흠모하여 시인이 되었다. 오늘날 백석의 『사슴』은 현역 시인 156명이 꼽은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따라서 백석은 시인의 시인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안도현, 『백석평전』).
“사랑은 가장 달고 가장 쓴 것.”이라고 고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는 말하였다. 백석에게서 마음을 훔친 첫 번째 여성은 통영의 여인 박경련이었다. 백석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만난 박경련을 오랫동안 못 잊었다. 백석은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 세 차례나 통영을 방문했지만 실패했다. 박경련 집안에서 가난한 시인을 반대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박경련을 소개한 백석의 절친 신현중은 박경련과 결혼함으로써 백석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1937년 봄은 백석에게 잔인한 계절이었다. 그러나 백석은 실연의 상처를 시로 승화시킨 천상 시인이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 |
| 백석과 사랑에 빠질 무렵, 자야의 고은 자태가 삼삼하다 |
백석이 자야를 만난 것은 1936년이었다. 백석은 그해 4월 초에 조선일보사에 사표를 내고 함경남도 함흥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백석은 운명처럼 기생 진향을 만난다. 진향은 백석을 만나기 전에 불리던 기명(妓名)이고, 자야는 백석이 단 둘이 있을 때 불렀던 애칭이다.
스물여섯의 백석은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에서 자야의 손목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 따위는 없을 거야." 그러나 두 사람은 운명의 장난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여러 번 경험한다. 그 사이 백석은 부모님이 짝지어준 여인과 두 차례 혼례를 치렀다. 이번에는 백석의 집안에서 기생인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기생은 총각하고 절대 결혼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스물두 살의 자야는 화가 이중섭이 가족과 헤어져 살다가 짧지만 한 번의 만남을 가진 것과 달리 분단으로 인해 두 번 다시 백석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녀는 청진동에서 1938년 12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백석과 동거생활을 하였다. 1939년이 저물어 갈 무렵 백석은 자야에게서 멀어져갔다. 1940년을 전후해서 모든 작가들과 시인들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친일문학으로 경도될 때 백석은 만주로 떠나야만 했다. 시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백석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시를 남기고 자야를 떠나갔다.
그 시절 자야가 백석과 함께 만주로 갔다면 그녀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스물세살이었고, 기생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을 것이다(이동순, 『나는 백석이다』). 자야는 세상을 떠나는 1999년까지 근 6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백석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 백석이 자야를 떠나면서 남긴 것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와 스물여섯에 찍은 백석의 사진이 전부였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이 아름다운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는 자야일 것이다. 자야는 백석의 시에 화답이라도 하듯 백석과의 못다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내 사랑 백석』(2011)이란 수필집을 남겼다.
![]() |
| 자야 김영한 여사는 눈이 푹푹 내리는 날 자신의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
한국의 명시로 남은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라는 시 한 구절이 있다. 백석의 삶을 운명처럼 예언한 시구이다. 백석은 가난하여 통영의 여인을 보내야만 했고, 자야와 헤어진 후 북한에서 외롭게 살아야만 했다. 그가 북한의 오지로 손꼽는 삼수군으로 쫒겨났지만 시인의 자존심을 지킨 것은 ‘높고’라는 시어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갈매나무와 같았던 백석은 여든다섯이 되는 1996년에 삶을 마감했다. 남겨진 가족은 아내 리윤희와 다섯 명의 자녀였다. 1999년 자야 여사는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독신으로 살다간 그녀에게도 1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그녀의 유언처럼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에 그녀의 유골은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7년간 땅속에 살다가 2주 동안 바깥 생활을 한다는 매미는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그렇게 우는 것이다. 분단으로 인해 6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매미처럼 울어야만 했던 백석과 자야는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세상을 떠나갔다. 누구에게나 매미처럼 한철 뜨거운 여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흰 눈이 푹푹 내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음영철 교수 hschamhope@naver.com
<저작권자 © 횡성희망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외협력관, 6년 전 논란을 다시 꺼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