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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철교수의 문화기행] 남도 답사를 다녀와서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승인 2024.12.02|(306호)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시월의 마지막 밤을 뒤로한 채 나의 애마는 남쪽을 향해 달려간다. 거의 10년 만에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예정대로라면 10시 30분에 중산리 탐방로에서 산행을 시작해야 했지만, 11시 20분이 넘어서야 본격적인 등산을 하게 되었다. 오는 길에 덤프트럭이 사고를 당해 옆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예측은 항상 빗나간다.

단풍으로 물든 지리산 중산리 계곡, 집채만 한 바위가 이곳이 지리산임을 보여준다.

중산리 주차장에서 천왕봉 정상까지 가려면 대략 5.2 킬로미터를 올라가야 한다. 예상 시간은 왕복 7시간이다. 지리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나는 한 달 전부터 수락산을 다녀왔고, 도봉산 와이 계곡 코스를 연습 삼아 등산하였다.
준비는 마쳤고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다가왔다. 중산리탐방안내소에서 칼바위까지 가는 길은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그러나 천왕봉(1,915미터) 정상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여름 산행과 달리 가을 산행은 도착 시간을 염두에 두고 올라가야 한다. 산속의 가을 햇살은 생각보다 짧기 때문이다. 천왕봉을 2시간 남겨 놓은 시점에서 우리 일행은 하산을 결정했다. 내년에는 중산리 코스가 아닌 백무동에서 숙박하고 새벽에 오르리라 기약해본다.

천왕봉 등정이 못내 아쉬웠던 일행은 로타리 대피소에서 가까운 법계사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법계사는 지리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1,400미터 고지에 있는 법계사는 연기 승려가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오후 햇살이 제법 많이 남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큰 바위 위에 있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남쪽의 산허리를 굽어보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발걸음도 가벼워진 터라 지리산을 내려오는 길에 중산리 계곡 두류생태탐방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계곡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어 이곳이 부속 도서를 제외한 남한 본토에서 가장 높은 산임을 한눈에 알게 하였다. 지리산은 어딜 가나 명품 아닌 곳이 없다.

해지기 전에 남해에 있는 숙소로 가기 위해서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맑고 시원한 계곡물에 땀에 절은 얼굴을 씻고 손발을 담그니 무릉도원이 여기로구나 싶다. 하나를 포기하면 또 다른 기회가 생기게 마련이다.

숙소에 짐을 풀은 일행은 남해대교를 지척에서 볼 수 있는 창 넓은 횟집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자 남해대교는 화장을 한 여인으로 돌변하였다. 문득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라는 시를 떠올려 본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른다.
마음속 깊이깊이 아로 새길까
기쁨 앞엔 언제나 괴로움이 있음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만 머문다.
......

기욤 아폴리네르와 화가 마리 로랑생은 사랑을 하고 이별을 아쉬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을 노래한 ‘미라보 다리’라는 시 한 편은 세느강과 함께 영원히 흐를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섬과 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는 어느 곳이나 추억과 낭만이 서려 있다.

이곳 남해는 회 맛도 좋으려니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여주인의 친절한 서비스도 일품이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머물고 싶은 지역에는 공통되는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 맛집이 많고 둘째, 사람들의 인심이 좋고 셋째,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남해대교 부근의 횟집은 삼박자를 갖춘 동네에 있어 앞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리라. 여기에 동행한 사람들과의 우정이 곁들여지면 잊지 못할 추억의 명소가 될 것이다.

남해대교는 밤이 되면 화장을 한 여인으로 돌변한다.

답사 둘째 날, 아침 햇살을 받으며 나의 애마는 남해 금산을 향해 달려간다. 남해 금산은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주차장에서 보리암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올라간다. 산꼭대기에 이를수록 경사가 가파르다. 아침인데도 이곳 보리암을 찾은 방문객들은 여전히 많다. 남해 보리암은 동해 홍련암, 서해 보문사와 함께 한국의 3대 해수관음기도처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별을 보는 암자라는 뜻을 지닌 남해 보리암은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황금절경으로 유명하다.

여수 하면 장범준의 ‘여수 밤바다’가 떠오르듯이 남해 금산에 오면 나는 이성복의 「남해 금산」이 생각난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 중에서

김훈은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2009)에 실린 「돌 속의 사랑-남해 금산」에서 ‘한 여자’가 ‘그 여자’가 되어가는 이야기가 이성복의 「남해 금산」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어른을 위한 동화로 익숙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에도 “나에게는 나의 장미꽃 한 송이가 수백 개의 다른 장미꽃보다 훨씬 중요해.”라고 말하는 어린 왕자가 나오는데 여기서 ‘나의 장미꽃 한 송이’는 ‘그 여자’와 닮은꼴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그 여자’와 ‘나의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나기 위해 타인의 돌 속으로 들어간 적이 있는가? 남해 금산 망대에 앉아 바닷물 속에 잠긴 섬들을 바라본다. 섬들은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다.

남해 금산 망대에 앉아 있으려니 나도 바닷물 속으로 잠기고 싶다.

답사 일행은 이제 답사의 종착지인 통영으로 간다. 가는 길에 잠시 독일마을을 둘러본다. 독일마을은 1960~1970년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족 부양을 위해 머나먼 독일에 가서 광부와 간호사로 일하다가 이곳 남해에 정착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생겨난 마을이다. 이제는 관광 명소가 되어 남해독일마을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에 오면 독일식 이름을 지은 펜션에 머물면서 삶의 여유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국적인 풍경이 느껴지는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있으려니 주황색 지붕 너머로 남해가 보인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성이 솟아오른다.

일행을 태운 나의 애마는 해 질 무렵에 통영에 도착했다. 일행 중 한 명이 현지인들이 먹는 다찌집으로 안내한다. 통영 다찌집은 바닷가 음식을 코스별로 맛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 지역에서만 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에 답사길은 고생길이어도 계속 가게 된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의 자랑이다.

아침에 일어난 일행은 동피랑 벽화마을을 끝으로 여정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동피랑 벽화마을은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의 자랑이다. 동피랑은 통영시 정량동에 있는 벽화마을로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서 생긴 이름인데 쉽게 말하면 동쪽의 벼랑이라는 뜻이다. 드라마 촬영지로도 많이 알려져서 주말이면 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동포루 근처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강구안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이번 여행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남해 금산」의 시처럼 내가 만날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리라!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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