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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철 교수의 문화기행]효원(孝園)의 도시, 화성(華城)을 가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승인 2025.06.29|(320호)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오늘 나의 애마와 함께 찾아간 곳은 정조대왕의 꿈을 담은 수원이다. 3월 하순에 대학원생들과 답사한 수원화성을 다시 찾은 것은 사진 때문이다. 초여름의 문턱에서 봄날에 찍은 사진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필력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3개월 전의 인상을 생생하게 글로 쓸 자신이 없다. 방학을 맞이하여 혼자 떠난 여행은 홀가분하여 기분이 좋다.

1시간을 넘게 달린 차는 점심 때가 되어서야 융건릉 1공용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첫 번째 답사지로 융건릉을 선택한 것은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화산 자락에 있는 융릉에는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인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현경황후 홍씨(혜경궁, 1735~1815)가 합장되어 있다. 말로만 듣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직접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호학군주 정조는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후에도 13년간이나 묘소에 참배하지 못하였다. 영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미움은 그만큼 컷던 것이다. 정조는 즉위한 후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공표하였고, 자신에 대한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의 무덤 수은묘(垂恩墓)를 이곳 수원으로 옮겨 규모를 크게 한 후에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이로써 사도세자는 사후, 아들에 의해 왕릉에 버금가는 무덤을 갖게 된 것이다. 훗날 고종 대에 이르러 현륭원은 융륭(隆隆)으로 격상되었고, 그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지게 된다. 이로 볼 때, 융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왕릉의 3대 분류인 묘(墓), 원(園), 능(陵)을 모두 겪은 왕릉에 해당한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을  소나무가 호위하고 있다. 아들 덕에 외롭지 않을 것이다.

융릉건릉 매표소를 지나 사도세자의 융릉으로 가는 길은 호젓하였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조선의 왕릉은 어디를 가나 자연 속에 있어서인지 마음이 편안하다. 그늘진 곳에 돗자리를 깔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홍살문 너머에 있는 정자각이 유월의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다. 융릉의 봉분은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커다란 덮개가 씌어져 있다. 정조는 수원을 열세 번이나 다녀갔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하여 사도세자를 평생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정조는 죽어서까지 아버지 곁에 잠들었다. 이로 볼 때, 그의 지극한 효심은 사후에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 사람들이 자신의 고장을 ‘효원(孝園)의 도시’라 부른 것은 다 사연이 있는 것이다(김준혁, 『리더라면 정조처럼』). 정조의 무덤인 건릉(健陵)은 병풍석을 생략한 채 난간석만 봉분 주위를 둘렀다. 이는 순조 시대에 이르러 왕실의 외척인 안동김씨가 권력을 잡고, 왕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답사를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전 계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언제, 어디를, 왜 가느냐에 대한 분명한 계획이 있어야 스토리텔링이 완성되는 것이다. 필자는 답사의 우선순위를 문화와 역사에 두고 계획을 짠다. 수원 외곽을 돌고 중심부인 수원화성으로 들어서는 여정을 세웠다.
융건릉 답사를 마친 필자는 두 번째 답사지인 ‘나혜석 거리’로 차를 몰아갔다.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위치한 나혜석 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김병종에 따르면, 수원이 고향인 나혜석은 1910년대에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유학하고, 유럽을 여행하며 필명을 날렸다고 한다(김병종, 『김병종의 화첩기행1』).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1928)’은 야수파 계열의 격정적인 필치가 돋보이는 명작이다. 그녀는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당대의 명사 최린(崔麟)과의 염문으로 인해 인생의 커다란 비극을 겪게 된다. 이 일로 원치 않는 이혼을 하게 된 나혜석은, 4남매의 아이들을 미치도록 보고 싶어 하다가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시대의 장벽을 뚫고 간 전사였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 「이혼 고백서」 중에서

나혜석 거리에 있는 ‘잠들지 않는 길’(2000)이란 조형물은 비운의 천재 여성화가 나혜석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자에 앉은 나혜석상 뒤로 커다란 벽이 세워졌는데, 그 벽은 나혜석이 생전에 온몸으로 싸워야만 했던 남성 중심의 사회를 상징한다. 나혜석은 선구자이자 신여성으로 그 벽과 평생 부딪치며 살아온 여성해방 전사이다. 갈라진 벽 사이로 소나무가 조각된 것은 그녀가 걸어간 길이 시들지 않고 영원히 푸르를 것임을 암시한다.

나혜석 거리를 빠져나온 나의 애마는 수원화성에 입성하였다. 수원화성은 경기도 팔달구 장안구 연무동에 있으며,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화성의 둘레 길이는 5.74km이며, 대한민국 성곽 건축의 백미에 해당한다. 해인사 장경각, 종묘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는 수원화성을 일컬어, “화성은 동서양을 막론하여 고도로 발전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 초기 군대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다.”라고 하였다. 정조는 완벽한 방어시스템을 구축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자 예술적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건축물을 이곳 수원에 짓고자 하였다.

정조는 1793년(정조 17년)에 수원이란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고치고, 이곳에 유수부(留守府)를 설치했다. 또한 측근들에게 화성을 아름답게 지으라고 주문했다. 화성이 완공된 뒤에 정조는 신하들과 화성을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한 신하가 정조에게 와서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드는 성을 굳이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정조는 “한갓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참으로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조실록』에 전해지는 이 글을 보면서, 정조대왕의 혜안을 느껴본다. 백범 김구도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바쁘게만 사는 현대인들은 높은 문화의 힘으로 나라를 보존하고자 했던 선인들의 깊은 뜻을 되새겨 봄이 좋을 듯하다.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은 조선왕조의 권위와 위용을 자랑한다.

수원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은 장안문(長安門)이다. 정조가 지은 장안문은 중국의 옛 왕조인 수,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시)’에서 따온 것으로, 뜻은 ‘국가의 안녕’을 담고 있다.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답게 2층으로 웅장하게 만들었으며, 왕권의 권위를 드높이고 있다.
장안문은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화성 성벽 곳곳에 움푹 파인 총탄의 흔적은 6.25 전쟁 당시에 생긴 것이다. 전쟁의 상처는 화성이라고 비껴가지 않은 것이다.
초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시간, 장안문 2층으로 올라가 본다. 넓은 공간에 마루가 있고 그곳에 외국인들이 앉거나 누워서 대화를 나눈다. 참 평화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은 이곳 장안문에 세계인들이 와서 쉬면서 노니는 것을 보면, 뭐라 말할까?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방화수류정은 화성 건축의 백미이다.

이 짧은 글에 수원화성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수원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마무리하는 글로 대신한다.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화성 건축의 아름다움을 뽐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정조대왕은 『삼국사기』의 「백제 본기」에 나오는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뜻의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를 몸소 실천한 왕이다. 정조는 국왕으로 있으면서 하루에 두 끼를 먹었으며, 한 끼에 반찬을 다섯 가지로 식사했다, 평소에는 비단옷이 아닌 무명옷을 입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장안문을 2층으로 짓고, 방화수류정을 화려하게 만든 것은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은 화홍문을 거쳐 수원 구시가지로 흐른다. 물의 도시인 수원을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수원천은 여러 지류와 만나면서 서해로 흘러갈 것이다. 정조의 효심과 정치적 이상이 맞물려 탄생한 수원화성을 뒤로 하면서 나의 애마는 서울로 올라간다.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정조의 거친 꿈은 어디로 갔을까? 다음 답사지인 중국 장안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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