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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초가을의 문턱에서 철원으로 떠났다. 철원은 어떤 곳인가? 철원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으며,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마주치는 곳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철원은 크고 작은 역사의 성패와 흥망성쇠가 있어 왔고, 6·25전쟁을 끝으로 잊혀져가는 강원도 지역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DMZ(비무장지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여도, 철원은 역사적·자연환경적으로 힘과 매력을 간직한 도시이다.
동북아시아 최대의 구석기문화를 간직한 철원의 랜드마크는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분단의 아픈 상처로 인해 탄식과 통탄의 의미를 지닌 ‘한탄(恨歎)’강으로 불렸으나, 본뜻은 ‘큰 여울’이다.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남북분단의 벽을 넘어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다가 현무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주상전리를 관통한다. 최근에 사람들이 즐겨 찾는 주상전리길은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연장 3.6km로 이루어진 절벽을 따라 설치된 잔도는 언제 걸어도 멋지다. 한탄강은 직탕폭포, 고석정, 순담과 같은 명승지를 감싸안고 굽이치다가 임진강과 합류한 후에 서해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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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원 고석정 꽃축제는 촛불맨드라미 하나만으로도 철원을 꽃축제의 상징적인 도시로 만들 것이다. |
서울을 출발한 나의 애마는 2시간 남짓 달려서 철원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고석정꽃밭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모여서 가을꽃을 감상하고 있었다. 과거 이곳은 탱크가 기동훈련을 하였던 포성 가득한 군 훈련장이었다. 그러다가 고석정꽃밭은 지난 2022년 9월에 정식 개장하였고, 총 면적 24ha 중 15ha 면적에 촛불맨드라미, 핑크뮬리, 천일홍, 코키아, 해바라기 등 100만 송이 이상의 다양한 꽃이 자라고 있다. 멀리서 봐도 강렬하게 눈에 들어오는 촛불맨드라미는 ‘열정’이라는 꽃말답게 황홀함 그 자체였고, ‘영원한 사랑’을 뜻하는 천일홍은 진분홍색으로 볼수록 아름답다. 철원 고석정 꽃축제는 촛불맨드라미 하나만으로도 철원을 꽃축제의 상징적인 도시로 만들 것이다. 지금도 ‘어린왕자언덕’에 있는 어린왕자와 사막여우는 고석정꽃밭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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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꺽정의 민담이 전해져오는 고석정은 사시사철 풍치가 수려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필자는 고석정꽃밭에서 가까운 고석정으로 발길을 돌리었다. 철원은 알려지지 않은 비경과 숨은 이야기가 많아 인문학자에게는 중부지방 최고의 답사지 중에 하나일 것이다. 고석정(孤石亭)은 이름만 보면 정자를 의미하나, 통상적으로는 한탄강 중류 강 중앙에 있는 20미터 높이의 고석(孤石)과 정자(亭) 및 그 일대의 현무암 계곡을 일컫는 말이다. 필자가 찾아갔을 때만 해도 유람선이 한탄강 물살을 가르고 하류로 떠가고 있었다. 시간만 충분했어도 뱃놀이를 했을 것이다. 고석정에는 임꺽정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홍명희의 소설로 유명해진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도둑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명종 때의 정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임꺽정은 불평분자들을 규합해 황해도,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빈민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임꺽정이 관군에 쫓겨 대피한 곳이 이곳 고석바위 안 석굴이었다고 한다. 수시로 꺽지로 둔갑하여 한탄강에 몸을 숨겼다는 민담이 전해져오는 고석정은 사시사철 풍치가 수려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고석정을 빠져나온 나의 애마는 철원의 근대문화를 간직한 철원역사문화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철원평야를 한눈에 보고 싶었던 필자는 철원역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운이 좋게도 다음 기차를 탈 수 있었다. 8명이 탑승할 수 있는 모노레일을 타고 소이산 종착지에 도착하니 대략 13분 정도 걸렸다. 소이산 정상까지는 내린 지점에서 700미터 정도 더 올라갔다. 소이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철원평야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가을 들녘은 황금색으로 물들었고, 때 이른 추수를 끝낸 곳도 있었다. 이곳 철원평야는 약 6천만 년 전에 현무암 화산 분출로 생긴 용암대지이다.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이 이곳 철원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용암대지이기 때문이다. 철원용암대지는 북한의 평강 일원에 위치한 680고지와 오리산에서 신생대 제4기 말에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이 철원 일대의 계곡과 낮은 지역의 화강암을 덮으면서 형성됐다고 한다. 제주도와 달리 이곳에서 벼농사가 가능한 것은 약 1억 년 전에 만들어진 화강암이 기반암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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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이산 정상에서 바라본 가을 들녘은 황금색으로 물들었고, 때 이른 추수를 끝낸 곳도 있었다. |
소이산 전망대에서는 북쪽으로 철원평야와 백마고지, 김일성고지(고암산), 평강고원, 궁예도성터, 월정역 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소이산 정상에는 얼마 전까지 미군 부대가 주둔했었으나 지금은 철수하여 건물만이 남아있다. 인생사가 그렇듯이 정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느린 속도로 내려오는 모노레일이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향할 때는 약간의 스릴이 있었다. 오를 때는 몰랐던 느낌이었다. 처지가 바뀔 때를 생각하면, 겸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철원역사문화공원은 1930년대 철원읍을 재현한 것으로, 2022년 7월에 개장했다. 1930년대 철원군은 인구 8만 명이 살았던 강원도의 3대 도시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허허벌판에 지어진 건물들이어서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1930년대를 복원했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철원은 강원 북부의 중심지가 되면서 도시 인구가 급증했다고 한다. 1934년에 문을 연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철원극장에서는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이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무용수인 최승희가 현대무용을 하였으며, 배뱅이굿의 명창인 이은관이 이곳에서 데뷔하였다. 지금은 변사와 함께하는 무성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철원군은 한때 북한 땅이었다가 6.25전쟁 이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구이다. 철원역사문화공원 길 건너편에 위치한 노동당사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배움터이다. 전에 왔을 때는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가까이 가질 못하였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이서 노동당사를 보았다. 군데군데 총탄 자국이 있고, 무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러시아식 3층 건물은 철원역사문화공원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느낌마저 주었다. 지금은 울타리가 쳐져 있어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1946년 북한 노동당이 철원과 인근 지역을 관장하기 위해 지은 이 건물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이들이 잡혀 와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을 당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건물은 2002년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역사의 상처는 덮을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치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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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고지위령비는 백마고지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의 넋을 달래기 위해 건립되었다. |
노동당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백마고지위령비가 있다.
저녁 무렵에 도착한 넓은 주차장에는 차량 2대가 자리를 잡고 있다. 백마고지위령비는 백마고지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의 넋을 달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에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뒤바뀔 정도로 6.25전쟁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에 하나이다. 효성산 한 기슭의 이름 없는 작은 고지가 극심한 포격으로 인해 산등성이의 나무가 다 쓰러져서, 하늘에서 보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1,000명이 훌쩍 넘는 목숨이 죽어 나간 곳이니, 이곳에 위령비와 기념관, 전적비와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운명이리라. 이곳에서 만난 문화해설사는 현재 백마고지는 출입할 수 없고, 고지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전적지를 조성하여 사람들에게 백마고지전투를 알린다고 한다. 통일이 되는 그날이 오면, 영령을 위로하는 백마고지위령비도 백마고지에 세워지리라.
백마고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상허(尙虛) 이태준의 고향인 용담마을이 있다. 해마다 11월 첫째 주 토요일에는 ‘상허 이태준 문학제’가 열린다고 한다. 1930년대 한국 문단을 주도했던 이태준은 한때 남한에서 배척받았던 문인이다. 북에서는 1956년에 ‘반종파 투쟁’에 휘말리면서 버림받았다.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 불렸을 정도로 이태준의 문학사적 위상은 높다. 통일이 되면 그에 대한 재평가가 남북에서 있어야 할 것이다. 2004년 11월 4일에 상허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태준 문학비와 흉상이 철원에 있는 두루미평화관 앞마당에 세워진 것은 월북 작가 이태준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다. 철원은 한반도의 중심에 세워진 도시이다. 지금은 폐역이 되었지만, 언젠가 월정리역에 다시 철마가 세워질 것이고, 철마는 원산으로 금강산으로 달릴 것이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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