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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철 교수의 문화기행] 원주를 풍경에 담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승인 2025.11.24|(329호)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내가 원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산천을 사랑한다는 얘기다. 원래의 대지, 본질적인 땅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原州>, 이름 그 자체를 나는 사랑했는지 모른다.” - 박경리,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중에서

10월 31일, 답답한 도시를 떠나 친구들과 간 곳은 설악산이었다. 나의 애마를 한계령 휴게소에 쉬게 한 후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10여 년 전에 설악산에 갔을 때만 해도 당연히 대청봉 정상을 찍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이번 가을 산행은 3시간 산행 후 간 곳을 기점으로 되돌아오는 일정을 잡았다. 9시에 출발한 일행은 바위로 된 산길을 오르다가 깨달았다. 아아! 이 산이 아닌가벼! 한계령 삼거리에서 길을 잘못 들어 귀때기청봉으로 간 것이다. 공자는 ‘삼인지행 필유아사(三人之行 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그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라 했거늘, 이번 산행에서 공자님 말씀도 가끔 틀릴 때가 있음을 깨달았다. 하산한 후에는 오색약수터 근방에서 멋진 단풍 구경을 하였다. 작은나마 위안을 얻은 일행은 속초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11월 첫날, 산행을 마친 답사 일행이 서둘러 간 곳은 원주시에 있는 강원감영(江原監營, 사적 제439호)이다. ‘강원’이라는 명칭도 강릉과 원주를 합친 말임을 이곳에 와서 뒤늦게 깨달았다. 이곳 강원감영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청이다. 조선시대에는 13개 도에 관찰사를 두었는데, 관찰사의 관아를 감영이라고 불렀다. 원주시에 위치한 강원감영은 1395년부터 1895년까지 500년간 강원특별자치도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공영주차장에 애마를 주차한 일행은 정문인 포정루(布政樓)를 지나 감영 안으로 들어섰다. 감영의 중심 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중심으로 국화꽃 축제가 열렸고, 후원에서는 농악이 한창이었다.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선화당은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조선시대의 명재상인 황희(黃喜)와 조선시대 최고의 가사 작품을 남긴 정철(鄭澈)도 이곳 강원감영에서 정사를 펼쳤다고 한다.

연못 가운데 있는 영주관(瀛洲館)은 청명한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아름답다.

후원에서는 꽹과리와 태평소 소리가 들리고 농악 공연이 신명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 가락은 언제 들어도 정감이 간다. 연못 가운데 있는 영주관(瀛洲館)은 청명한 가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아름답다. 연못가에 심어진 65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도 자기를 보라는 듯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래저래 가을은 단풍으로 익어간다.

원주시 문화의 거리에는 ‘2025 원주 국제라인댄스 마라톤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감영을 빠져나온 일행은 원주 중앙시장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신호등 건너 골목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신나는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가니 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가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원주시 문화의 거리에서 ‘2025 원주 국제라인댄스 마라톤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떨어진다’라고 했던가. 1년에 한번 있는 축제를 가까이서 접하고 보니 감동이 물결친다. 엄마를 따라왔던 어린 아이도 라인댄스 리듬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춘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가무(歌舞)에 능하다더니 원주시에 와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행사에는 5개국에서 700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특히 원주에서 처음으로 열린 국제 규모의 라인댄스라는 점에서 도시가 젊어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앙시장에서 전과 튀김, 전병을 산 일행은 서둘러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나의 애마는 속도를 내어 박경리 뮤지엄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생의 마지막 공간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박경리 뮤지엄이 문을 닫았다. 보통은 방문객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주말에 문을 여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박경리 뮤지엄은 주말과 월요일에는 문을 닫았다. 답사는 사전 준비가 철저해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운 일행은 박경리 작가가 생활했던 ‘작가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길가에는 박경리 전신 동상이 있어 우리를 반겨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창문을 통해 위대한 작가인 박경리의 생활공간을 엿볼 수 있었다. 이곳은 필사 체험실, 생활실, 전시 공간, 영상 감상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경리 작가는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보냈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에 끝을 보았다. 장장 2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사반세기가 넘게 걸린 이 작품은 시간적으로는 1897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를 다루었고, 등장인물도 700여 명에 이르는 대작이다. 일본의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가 쓴 역사소설 『대망』(27권)의 집필 기간이 대략 18년 정도라고 하니, 박경리 작가의 집념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이곳 원주에서 2008년 타계할 때까지 작품을 썼다고 하니, 대작가의 삶에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집’ 앞에 있는 박경리 전신 동상에는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Dreamers Create)”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작가의 집 맞은편에는 ‘토지문화관 창작실’이 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인 계경배 동화작가는 박경리 전신 동상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2025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스토리 부분’ 우수상을 수상한 계 작가는, 잠시나마 박경리 작가로부터 기운을 받아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빌었다고 한다. 될 수만 있다면 문인의 창작 공간인 토지문화관 창작실에서 그의 역작인 <역관 그레이스>가 완성되었으면 한다. 박경리 전신 동상에 새겨진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Dreamers Create)”라는 말처럼, 필자도 글쟁이의 삶이 이어지기를 기원하면서 박경리 뮤지엄과 작별했다.

섬강이 남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이곳이 바로 문막이다. 일행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반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67호)’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8』를 읽고 언젠가는 문막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이왕이면 은행잎이 지기 전에 가고 싶었는데, 적당한 시기에 이곳을 답사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필자는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보니 그 웅장함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높이 32미터, 가슴 높이의 둘레가 16미터나 되는 반계리 은행나무는 어른 8명이 팔을 둘러야 잡힌다고 한다. 책에도 나왔듯이 현존하는 은행나무 중에서 반계리 은행나무는 키가 가장 크고, 둘레도 가장 굵은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한 그루의 나무를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하니 분명 신목(神木)이리라!

반계리 은행나무는 높이 32미터, 둘레가 16미터나 되는데 어른 8명이 팔을 둘러야 잡힌다고 한다.

일행은 반계리 은행나무가 잘 보이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주 중앙시장에서 사온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일행 중에는 사별한 커플이 함께했는데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이야기도 풍성하였다. 시절 인연이 닿아 친구처럼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멀리 치악산을 배경으로 한 반계리 은행나무는 최근 조사에 따르면, 1317년경에 심어졌다고 하니, 대략 700년이 넘는 수령이다. 바라건대 반계리 은행나무가 이곳을 찾는 사연 많은 인생들의 벗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일행은 원주 답사 마지막 행선지인 원주시 부론면 거돈사지를 향해 급하게 서둘러 떠났다. 거돈사지는 남한강변의 폐사지로 익히 알려진 곳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있어 어디든 쉽게 갈 수 있지만, 그 옛날의 고속도로는 뱃길이었다. 남한강변에 절이 많았던 것도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되면서, 남한강변의 절들은 폐사찰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남한강변인 여주에 신륵사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이다.

일행이 거돈사지에 도착하니 땅거미도 진 밤이었다. 그곳에서 본 것은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750호)’과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보물 제78호)이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 석탑으로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 양식과 흡사했다. 2단 기단 위로 3층의 석탑이 탑신(塔身)으로 올린 형태는 균형미가 돋보였다. 절터의 동쪽에 위치한 원공국사탑비는 고려시대의 유명한 스님인 원공국사 지종(智宗, 930~1018)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글은 최충(崔沖)이 지었고, 글씨는 김거웅(金巨雄)이 썼다고 하는데 고려시대의 여러 비 중에서도 매우 뛰어났다. 스마트폰 후레쉬 불빛을 받은 탑비의 거북머리가 용머리같아 더욱 무서웠다, 이번 답사는 야간까지 이어질 정도로 힘겨웠다. 먼 훗날에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원주를 떠난 일행은 구름에 달 가듯이 서울로 향하였다. 가을밤도 어느새 깊어갔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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