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다사다난했던 한 해도 저물어가고 있다. 2025년은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중이다. 2024년 6월부터 <횡성희망신문>에 매달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해를 넘겨 연말까지 이어진다. 이 글까지 포함하면 20편이 된다. 12월은 1년을 마무리하는 달이기에,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강화도를 쓰려고 한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태조 22년(939년)이었다.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흘러드는 곳으로, ‘강 아래의 마을’인 강하(江下)로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인 강화(江華)가 되었다고 한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이곳 강화는 서해안에서 한강을 지나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출입로였기에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다. 최후의 보루이기도 한 강화도는 39년 동안 고려 무신정권의 수도였으며, 병자호란 당시에는 인조가 도피하려다 실패한 섬이었다. 강화는 조선의 제25대 임금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평범하게 살던 곳이기도 했다.
횡성을 출발한 나의 애마는 오후 4시 무렵에 강화도 초지진에 도착하였다.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초지진은 내륙을 지키는 1차 방어선이다. 초지진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 해군과 충돌했던 격전지였으며, 일본이 도발한 운요호 사건 때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필자가 도착하였을 때는 날이 흐리고 바람도 제법 쌀쌀하였다. 400년 정도 되는 초지진 소나무에는 운요호 사건 당시 날아온 포탄의 파편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 |
| 광성보 신민순의총(辛未殉義塚)에는 미군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한 조선의 군졸 51인이 잠들어있다. |
초지진을 떠난 나의 애마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광성보로 달려갔다. 강화의 12진보 가운데 하나인 광성보는 1658년(효종 9)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정문인 안해루(按海樓) 옆에는 광성돈대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신미양요 당시 실제 사용했던 대포(사거리 700미터)와 소포(사거리 300미터)가 당시의 역사를 증언하였고, 그 옆에는 연속사격이 가능한 불랑기가 있었다. 어재연(1823~1871) 장군의 인솔하에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미 해군과 맞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대원군은 1873년에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려 쌍충비를 세웠다. 쌍충비각 아래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잠들어있다. 포로가 되기를 끝내 거부한 군졸 51인의 분묘를 보니 마음이 절로 숙연해진다.
나의 애마는 강화군 화도면 내리에 있는 후포항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조그마한 어항인 후포항에서 여장을 풀기 위해서였다. 숙소 가까운 횟집에서 난생처음으로 밴댕이 맛을 봤다. ‘밴댕이 소갈딱지’란 말이 생각나서 인심 좋은 주인에게 밴댕이가 어떤 물고기인지 물어봤다. 밴댕이는 성질이 급해 잡히자마자 죽는다고 하였다. 소갈딱지란 말이 궁금해서 어원을 찾아보니, ‘소갈’은 평안도 사투리에서 유래한 단어로 ‘속’이라는 의미이다. ‘딱지’는 주로 물건이나 사람의 겉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소갈딱지는 ‘소갈’과 ‘딱지’가 합쳐진 말인데, 여기에 밴댕이가 덧붙여져서 ‘속 좁고 참을성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탄생한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최소한 ‘밴댕이 소갈딱지’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밤이 깊어지면서 바람 소리가 거세진다. 황해 바닷물결은 바람과 함께 어딘가로 떠밀려 갈 것이다.
12월 1일, 아침이 밝았다. 마니산 주차장에 애마를 세운 나는 GS25에서 컵라면으로 간단히 요기를 때웠다. 마니산(摩尼山)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있는 해발고도 472미터의 산이다. 이곳에 온 목적은 딱 하나다. 참성단(사적 제136호)을 보기 위해서였다. 겨울 아침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1004계단으로 난 길로 접어든 필자는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마니산 참성단에 올랐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가? 세상은 온통 파란색의 향연이다.
![]() |
| 참성단은 경주의 첨성대처럼 하단은 둥글게 쌓아 하늘을 상징하고, 상단은 네모나게 만들어 땅을 표상한다. |
고려사 56권 지리지에는 “마니산은 강화부의 남쪽에 있다. 산 정상에는 참성단이 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성단은 경주의 첨성대처럼 하단은 둥글게 쌓아 하늘을 상징하고, 상단은 네모나게 만들어 땅을 표상한다. 먼 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겨울 햇살이 따사로워 잠시 머무는 중에 80년 만에 참성단을 오른 노인을 만났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곳까지 왔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생전에 가보고 싶었기에 왔으리라! 참성단을 지키는 소사나무만이 그 심정을 헤아리고 위로해 주길 바랄 뿐이다.
나의 애마는 강화 8경의 하나인 전등사를 향해 달렸다. 삼랑성 내에 아늑히 자리하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절이다. 처음에는 진종사(眞宗寺)라 이름을 지었는데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전하면서 전등사(傳燈寺)로 개명하였다. 정화궁주는 충렬왕의 정실이지만,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제2비로 떨어져서 40여 년간 별궁에 거처하였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다 간 정화궁주의 한 많은 사연은 전등사의 역사와 함께 자손만대 전해질 것이다.
전등사에는 누구나 한번은 본다는 나녀상(裸女像)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녀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상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광해군 때 대웅전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래에 사는 주막집 여인과 눈이 맞아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막집 여인은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울분을 느낀 도편수는 그 여인의 모습을 닮은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떠받치게 하였다. 그 까닭은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에게 그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
| 강화도에는 현재 160여 개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으뜸은 강화부근리지석묘이다. |
전등사 남문의 문루인 종해루(宗海樓)를 빠져나온 필자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강화부근리지석묘(사적 제410호)’를 향해 차를 몰아갔다. 강화도에는 현재 160여 개의 고인돌이 있다. 그중에 으뜸은 강화부근리지석묘이다. 먼발치에서 한눈에 들어오게 조성된 이 고인돌은 넓은 대지를 발판 삼아 두 개의 받침돌을 세웠고, 그 위에 평평한 덮개를 올렸다. 유홍준 선생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4』 북한 편에 보면, 우리나라를 고인돌의 나라라 일컬으면서 북한에는 약 2만 기, 남한에는 어림잡아 3만 기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세계 미술사의 지평에서 한국미술을 평가할 때,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첫 번째 유물이 고인돌이라는 선생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은 곳곳이 고인돌로 가득 찬 왕국이다(2000년에 강화도·고창·화순의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한 땅에서 고인돌이 발견되는 곳은 낮은 구릉지대라고 했는데,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일대는 전형적인 낮은 구릉지대이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인데,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생김새에 따라서는 땅 위에 책상처럼 세우는 탁자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들로 고이거나 받침돌 없이 평평한 돌을 얹는 바둑판식으로 나뉜다고 한다. 바쁘게만 사는 현대인을 보면, 거석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까? 3천 년 전에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밤하늘의 별을 헤아린 청동기인의 삶이 어쩌면 땅만 보고 사는 도시인보다 낫다고 하지 않을까.\
![]() |
| 강화 8경의 하나로 손색이 없는 연미정에 오르면, 강화도에서도 으뜸인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다. |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미정이 있다. 월곶돈대 안에 있는 정자 뒤로는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강화도 동북단에 이르러 서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와 같다고 하여 연미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강화 8경의 하나로 손색이 없는 연미정에 오르면, 강화도에서도 으뜸인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다.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진 정자에 오르면 날씨가 맑은 날에는 북으로는 개풍군과 파주시를 볼 수 있고, 동으로는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아담한 정자는 팔작지붕으로 멋을 내었고, 520년 이상 장수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정자와 벗이 되어 지켜주고 있다. 또한 연미정은 인조 5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을 당하여 조선과 후금(後金 뒤의 淸)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1박 2일 동안 강화를 답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호국과 항쟁의 섬, 강화도는 역사를 배우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13세기 후반의 대몽항쟁, 19세기 중반의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에 따른 강화도 조약 등등 역사 유적지가 즐비하다. 2025년도 이제 곧 있으면 작별해야 한다. 2026년 병오년 말띠해에는 어느 방향으로 달릴 것인가? 강화도를 떠나 서울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저작권자 © 횡성희망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외협력관, 6년 전 논란을 다시 꺼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