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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 |
국회의 시계가 드디어 5년 만에 제시간에 울렸습니다. 여야가 12월 2일, 법정 시한을 지켜 728조 원 규모의 2026년도 예산안 처리에 합의했습니다. 2020년 이후 매년 반복되던 '지각 처리'라는 꼬리표를 떼고, 모처럼 국회가 헌법이 정한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극한의 대치 정국 속에서도 파국 대신 타협을 선택한 여야의 결단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번 합의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의미'만큼이나 짙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를 넘어선 정치
이번 예산안 처리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보다 ‘정치의 복원’일 것입니다. 이재명 정부의 첫 본예산이라는 상징성 앞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원안 사수'를, 야당인 국민의힘은 '삭감'을 외치며 팽팽히 맞섰죠. 자칫 준예산 사태까지 걱정되던 상황에서, 여야는 ‘총지출 규모 유지’라는 큰 틀에 합의하며 접점을 찾았습니다.
여당은 지역화폐와 국민성장펀드 등 핵심 공약을 지켜냈고, 야당은 법인세 인상 저지를 일부 양보하는 대신 가스 배관망 지원 같은 생활 밀착형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며 실리를 챙기는 '주고받기'가 작동한 것이죠. 민생 앞에서는 정쟁도 잠시 멈출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미래는 깎고, '실세 예산'은 챙겼다
하지만 합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뼈아픈 대목들이 보입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미래 성장 동력을 깎아내고 그 자리를 지역구 예산으로 채웠다는 점입니다.
정부와 여당이 확장 재정 기조를 지키려 애쓰는 과정에서, 정작 미래 먹거리인 인공지능(AI) 지원 예산은 적지 않은 폭으로 삭감되었습니다. 글로벌 기술 경쟁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 시점에, R&D와 신산업 예산이 줄어든 것은 근시안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막판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지역구 예산 챙기기' 논란은 뒷맛을 씁쓸하게 합니다. 물론 선출직 국회의원이 자신이 대표하는 지역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고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려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책무이자 권리입니다.
문제는 그 과정의 ‘투명성’과 ‘형평성’입니다. 언론 보도를 보면 협상의 키를 쥔 여야 지도부 등 이른바 '실세' 의원들의 지역구 예산이 대거 증액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가 전체의 미래를 위한 AI 예산은 줄이면서, 힘 있는 의원들의 지역구 도로나 건물 예산은 알뜰히 챙겼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법정 시한 준수라는 명분 뒤에서 여야가 서로의 지역구 이익을 눈감아준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됩니다.
예산 통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산안 통과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5년 만의 시한 준수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제 국회는 본연의 역할인 ‘집행 감시’와 ‘민생 협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첫째, 멈춰 섰던 ‘민생경제협의체’의 시동을 다시 걸어야 합니다. 예산안 처리를 계기로 여야는 지난 9월 합의했던 민생경제협의체를 즉각 가동해야 합니다. 예산안에 미처 담지 못한 반도체 인력 지원이나 저출생 대책 등은 입법과 정책 조율이 필수적입니다. 예산이라는 '총알'이 준비되었다면,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전략'을 협의체에서 마련해야 합니다.
둘째, 재정이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엄격히 감시해야 합니다. 728조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확정되었습니다. 국회는 이 돈이 단순히 힘 있는 의원들의 지역구 치적 쌓기용으로 소모되지 않고, 지방 소멸을 막고 기업 투자를 이끄는 마중물이 되도록 집행 과정 전반을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OECD가 한국 경제에 대해 “재정 누수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경고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5년 만에 제시간에 도착한 예산안 버스에 이제 국민들의 희망을 태울 차례입니다. 여야가 보여준 이번 합의의 정신이 정치적 셈법을 넘어, 내년 우리네 삶의 현장 곳곳에서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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