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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철 교수의 문화기행] 동트는 동해에서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승인 2026.01.19|(333호)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던가. 한해의 끝을 태백산 정상에서 마무리하고, 새해의 시작은 해 뜨는 동해에서 맞이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다가 일요일 새벽에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나의 애마는 달리고 달려 태백산 유일사 주차장에 일행을 풀어놓았다. 좁은 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니 눈길이 펼쳐졌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다시 오르기를 한 시간 남짓하니 매서운 바람이 능선을 타고 불기 시작하였다. 예전에 소백산 칼바람을 경험한 터라 강도는 약했지만 그래도 천 오백 고지에서 부는 바람은 손끝을 시리기에 충분했다. 천제단 근처에 이르자 흰 눈에 덮인 주목 군락이 펼쳐진다. 올해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설경이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순수를 꿈꾸며」)라는 시를 남겼는데,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 나무는 흰 눈에 덮여서일까. 순수만이 남은 것 같다.
태백산(太白山)은 가장 높고 큰 봉우리에 자갈과 모래가 널려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는 “태초에 하늘나라 환인의 아들인 환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어 우리 민족의 터전을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일까? 태백산은 해마다 1월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몸살을 앓는다.

산행을 마친 일행은 동해로 가는 길에 잠시 황지연못에 들렀다. 그곳에 일행의 누님이 살고 있었는데, 아무리 바빠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백으로 시집을 왔다는 일행의 누님은 파리바게뜨에서 빵을 샀다며 건네주었다. 강원도의 정(情)이 느껴진다. 짧은 만남이었기에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일행은 동해에 있는 숙소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숙소를 빠져나온 일행은 묵호항으로 갔다. 오징어와 명태로 유명했던 묵호항은 한때 동해의 대표 항구였다고 한다. 저녁 무렵이라 어시장은 한산했다. 일행 중 한 명이 최고의 어종인 줄가자미를 놓고 주인과 흥정하다가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수산시장에서 감성돔, 광어, 문어, 오징어, 멍게, 소라를 샀다. 인심 좋은 사장이 동해안에서만 나온다는 소라와 줄가자미 새끼를 주자 일행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른 아침에 어부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바다 깊은 곳에서 잡아 온 생물인지라 감사한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이튿날 아침 7시가 되자 필자는 잠든 애마를 깨워 추암해변 촛대바위로 달려갔다. 떠오르는 태양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능파대(凌波臺) 주변으로 5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앉아 있다. 수평선 끝에는 구름이 간간이 보이는지라 해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옅은 구름을 뚫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능파대에서 바라본 태양은 사진으로 담기에는 뭔가 허전하였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추암촛대바위 출렁다리였다. 2019년 6월에 개장한 출렁다리에 오니 촛대바위가 한눈에 들어오고 일출의 광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경이롭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바닷물결은 호수처럼 잔잔하였고 촛대바위가 먹칠을 한 것처럼 음영을 드리울 때, 태양이 동해를 붉게 물들이면서 떠오른다.

바닷물결은 호수처럼 잔잔하였고 촛대바위가 먹칠을 한 것처럼 음영을 드리울 때, 태양이 동해를 붉게 물들이면서 떠오른다.

2025년 한해를 돌아보면,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대한민국호는 거친 역사의 풍랑과 싸우며 대양으로 항진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정치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오로지 시민의 집단지성만이 나침판이 되어 난파 직전의 대한민국호를 이끌었다. 배는 포구에 있을 때 안전하지만, 바다에 떠 있어야 제구실을 한다. 그것이 배의 운명이다. 어부가 파도가 무서워 바다를 등질 수 없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2026년도에도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붉은 말의 해인 병오년 새해에는 정치가 민생의 바다에서 더 이상 표류하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은 신선이 노닐었던 ‘무릉계곡’으로 길을 떠났다. 두타산 산길을 걷다 보니 ‘동해 무릉계곡’ 게시판에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 사이를 흐르는 4km 길이의 계곡”이라고 쓰여있다. 이어서 두타산(頭陀山)의 두타는 산스크리트어 ‘dhuta’ 소리를 한자로 받아적은 것으로, ‘불도를 닦는 수행’을 뜻한다고 한다. 금란정에 이르니 그 아래로 넓은 반석이 펼쳐지고 수많은 글씨가 수 놓여 있다. 그중에 압권은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動天)이라는 웅장한 암각서이다. 글의 뜻은 “신선이 노닐던 세상의 별천지, 물과 동리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이 열리네”이다.

무릉반석에는 “신선이 노닐던 세상의 별천지, 물과 동리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이 열리네”를 뜻하는 글자가 쓰여 있다.

이 글씨는 봉래 양사언이 썼다는 설과, 옥호자 정한언이 썼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누가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묵객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잠시 쉬어갔다는 점이다. 고려말의 유신(儒臣) 길재는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고 읊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인걸은 사라졌어도 그들이 남긴 글자만이 남아 유한한 인생을 되돌아보게 한다. 무릉반석 또한 무심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는 기록으로만 남을 것이다. 사람의 몸도 그가 남긴 글자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으로 돌아감은 정한 이치 아니겠는가!

필자는 일행 중 한 사람과 함께 10여 년 전에 두타산과 청옥산을 하루에 등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갈 길이 급해 삼화사(三和寺)를 지나쳐 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젊은 시절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나이가 들면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삼화사에서 본 삼층석탑도 그중에 하나다. 대개의 삼층석탑이 화강암으로 축조되었다면, 이곳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은 석회암으로 세워졌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삼화사 삼층석탑은 9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세월의 풍상이 돌탑 전체에 묻어나와 독특한 위용을 자랑한다. 그러나 삼화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4.7m이어서 불국사 석가탑(10.75m)에 비해 조형미는 떨어지는 편이다.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논골담길은 묵호항 뒤편 비탈진 언덕에 조성된 판잣집 동네로, 질퍽한 흙길 때문에 ‘논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무릉계곡을 빠져나온 일행은 점심때가 되어 논골담길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한국의 산토리니라 불리는 논골담길은 묵호항 뒤편 비탈진 언덕에 조성된 판잣집 동네로, 질퍽한 흙길 때문에 ‘논골’이라 불렸다고 한다. 일행은 묵호항에 인접해 있는 논골담길을 가기 위해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술과 바람의 도시’였던 묵호는 한때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화주와 선원들은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거친 바다를 드나들었을 것이다. 묵호등대와 가까운 곳에 「논골 담화」(김진자)란 시가 적힌 담벼락에 이르러서야, 그 옛날의 묵호를 떠올릴 수 있었다.

평생을 발아래 바다를 두고 살아온 사람들
고샅길 산등성이에 매서운 바람이 들이쳐도
아부지들은 먼 바다로 익까바리 나가셨다
……

어렵고 힘들었던 1970년대, 대다수의 어머니들은 집에서 자식을 길렀고, 아버지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고 일을 했다.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어촌도시였던 묵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6년, 동해에 불어닥친 폭풍으로 발생한 어선 조난 사고는 327명의 사망자 또는 실종자를 낳았다. 「논골 담화」란 시에는 익까바리(먼바다로 오징어 잡으러 갈 때 묵호 사람들이 쓰던 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내와 식구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논골담길에서 봤던 김영현의 「아버지 혼불의 바다」에도 「논골 담화」와 비슷한 묵호의 슬픈 역사가 담겨 있다.

묵호항 땅끝까지 달려온 일행은 이제 동해 바닷속으로 2025년 을사년(乙巳年)의 허물을 벗어 던졌다. 안 좋은 과거는 잊고 살아야 한다. 2026년 새해에는 독자 여러분도 슬픔보다는 기쁜 일이 많기를 소망한다. 이왕이면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벗들이 곁에 있으면 좋을 것이다. 이것이 동트는 동해가 내게 준 새해 선물이다.

2026년 새해에는 독자 여러분도 슬픔보다는 기쁜 일이 많기를 소망한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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