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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한 달 전이다. 하필이면 기온이 영하 14도까지 내려간 날에 영주로 떠났다. 이유는 딱 하나, 부석사의 석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서울에서 가자면 2시간 30분이나 걸리고 날씨도 가장 추운 날인데도 말이다. 영주 여행을 꿈꾼 것은 작년 가을부터였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가고 싶었는데, 해를 넘겨 차일피일 미루다 무작정 영주로 나의 애마를 몰아갔다. 내게 영주는 젊은 날의 빛바랜 흑백 사진이어서 어쩌면 그곳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나의 애마는 12시가 넘어서야 무섬마을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언젠가 사진에서 보았던 영주시 외나무다리에 가보고 싶었다. 무섬마을은 4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만나,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동네이다.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하여 무섬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외진 곳에 촌락을 이루고 살던 무섬마을 사람들은 외나무다리를 통해 학교도 가고,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고, 나이 들면 꽃상여를 타고 이곳을 떠나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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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섬마을 사람들은 이곳 외나무다리를 통해 학교도 가고,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고 갔을 것이다. |
무섬마을에는 예부터 권 씨 부인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무섬마을에 살던 선비 ‘김낙수’가 봉화 유곡의 권가네 규수와 혼인날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여인이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선비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파혼을 권유했지만, 선비는 규수의 가슴에 평생 한이 되는 칼을 꽂을 수 없다며 여인과 혼례를 치렀다. 선비는 몸이 허약한 권 씨 부인을 위해 명약을 쓰고 명의를 데려와 돌보았지만 결혼 1년 6개월 만에 결국 여인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무섬마을에 큰불이 났다. 마을 전체가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인 순간 녹의홍상을 한 젊은 부인이 홀연 나타나 치맛자락을 펼쳐 화마를 막아냈다. 선비의 아내는 죽어서도 은혜를 갚은 것이다. 요즘처럼 인정이 메말라 가는 시대에 무섬마을의 권 씨 부인과 김낙수의 사랑 이야기는 훈훈한 감동을 준다. 강바람이 매서워서인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데 손이 무척 시리었다. 그래도 은백색 백사장을 배경으로 한 마을 정경을 사진에 담으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리라.
차를 돌려 영주역으로 갔다. 점심을 기대했던 무섬식당은 겨울이 되면 문을 닫는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 알게 되었다. 답사의 기본 수칙인 사전 조사를 무시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영주 시내에서 뒤늦은 점심을 먹은 필자는 소수서원으로 차를 몰았다. 겨울이어서인지 주차장은 한산했다. 매표소를 지나 소수서원으로 가는 길옆으로는 3백 년에서 천년에 가까운 적송이 들어서 있다. 서원에서 공부한 서생들이 길을 오가며 바라본 소나무이기에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린다.
조선 중종 37년(1542년)에 풍기 군수였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인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의 연고지에 선생의 위패를 봉인하고,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다. 명종 5년(1550년)에 이르러서는 퇴계 이황 선생이 나라에 건의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를 이룬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고,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일컫는 말이다. 소수서원은 201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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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락재(우측)는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다”라는 말에서, 학구재(좌측)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라는 뜻에서 따왔다. 주로 어린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
경렴정(景濂亭)을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가니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강학당이 나타난다. 건물 안 벽면에는 조선의 13대 임금이었던 명종이 쓴 소수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다”란 뜻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명종이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담아낸 것이다. 영남의 젊은 인재들은 이곳에 모여 임금의 친필을 보며 몸과 마음을 닦고 학문을 수양했을 것이다. 소수서원 안의 여러 건물 중에서 필자의 눈에는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齋)가 들어왔다. 지락재의 지락은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에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에서 따온 것으로,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학구재의 학구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라는 뜻이다. 주로 어린 학생들이 생활했던 공간이어서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한다.
소수서원에서 가까운 곳에 소수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선비문화를 조명한 ‘유교 전문박물관’이다.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실내로 들어서니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이곳에는 안향 초상이 모셔져 있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인데, 아쉽게도 원본은 볼 수 없었다. 소수박물관을 나오자, 저 멀리 눈 덮인 소백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소백산은 영주·예천·단양·영월의 배경이 되어 준 고마운 산이다. 해마다 5월이면 철쭉꽃이 장관이며, 년 중 6개월 정도 백설로 뒤덮인 비로봉은 한국의 알프스로 불리고 있다.
나의 애마는 소수서원에서 얼마 멀지 않은 부석사로 발길을 재촉했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영주의 랜드마크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고등학교 시절 어느 수필에서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란 말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가을에서야 최순우가 쓴 「부석사 무량수전」이란 글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 안양문 · 조사당 · 응향각 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나를 이곳 부석사로 다시 오게 한 것은, 최순우 선생의 이 문장이었을 것이다. 부석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부석사 일주문 근처에 이르자 사과밭이 눈에 들어왔다. 겨울바람이 매서운데도 사과를 파는 주인 내외는 드문드문 오는 손님에게 사과를 팔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살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부석사에 올랐다.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천왕문을 지나 절 안으로 들어섰다. 과연 기대했던 것보다 웅장한 절집이다.
범종루를 지나 안양루에 오르니 눈앞에 석등이 나타난다. 유홍준 선생은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이 석등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화려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고 했다. 무량수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8각의 화사석(火舍石)은 불빛이 퍼져 나오게 만든 4개의 창과 4면으로 되어 있다.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한 자태는 이 석등이 왜 대한민국 최고의 석등인지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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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은 가람 배치는 말할 것도 없고 처마의 휘어진 곡선은 장중함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
아미타여래를 모신 법당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찬찬히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감이 차오른다. 일반 절에서는 볼 수 없는 가람 배치는 말할 것도 없고 처마의 휘어진 곡선은 장중함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건축물인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어 그 빼어남을 보여주었다면, 고려시대의 건축물인 부석사는 무량수전 하나만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내 가슴을 뛰게 한 것은 무량수전 안양루 앞에 펼쳐진 장대한 풍경이다. 유홍준 선생 또한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라 했다. 독자 여러분도 늦가을 해 질 무렵에 부석사 무량수전에 올라 소백산맥 연봉들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일망무제의 광경을 보기 바란다. 그때 비로소 부석사는 뜬 돌이 되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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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 안양루 앞에 펼쳐진 소백산맥의 장대한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탁 트인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
어둡기 전에 과수원 주인을 만나려고 했으나 늦어서인지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시식으로 먹었던 사과 맛이 일품이었는데 사과를 끝내 사지 못했다. 천상 사과 주인과의 약속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다. 부석사를 내려온 나의 애마는 풍기역 근처에서 여정을 풀었다. 풍기인삼시장을 둘러본 후에 필자는 풍기역에서 가까운 한결청국장 집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80년대부터 3대째 이어온 청국장의 맛은 깊었다. 어느덧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다음 답사지를 정하지 못하다가 영월에 가기로 했다. <왕과 사는 남자>에 나온 청룡포가 내 마음을 흔들었기에.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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