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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철 교수의 문화기행]왕과 사는 남자의 도시, 영월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승인 2026.04.16|(339호)
음영철 교수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 왕방연의 시조

의금부도사 왕방연은 영월에서 단종의 사형을 집행하고 한양으로 가던 길에 시조 한 수를 남겼으니, 그것이 ‘고운 님 여의옵고’이다. 왕방연은 무너져 내린 자신의 심정을 흐르는 강물에 이입하여 울면서 간다고 했다. 세월유수(歲月流水)라 했던가? 단종(端宗, 1441~1457) 사후 600여 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장항준 감독이 만든 <왕과 사는 남자>가 역대 흥행 2위를 달리고 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극장에 가게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람은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거나 희생된 사람을 존중해 왔다. 단종이 17세의 어린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청령포에서 이번 답사기를 시작해 본다.

청령포(淸泠浦, 명승 제50호)는 단종이 4개월 남짓 유배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곳에 가면 영월 읍내 서강 건너편의 울창한 솔밭을 볼 수 있다.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을 강물이 맴돌아가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산이 솟구쳐 있다. 영화에서는 엄흥도(유해진 역)가 한명회(유지태 역)에게 겨울에는 냉기가, 절벽에서는 한기가 내려오는 조선 최적의 유배지로 청령포를 추천한다. 과연 청령포는 배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육지의 섬이라 불릴 만하다. 단종은 즉위 3년 만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한양으로부터 천리나 떨어진 이곳으로 원주, 주천을 거쳐 7일 만에 도착하였다.

청령포(淸&#27872;浦, 명승 제50호)는 단종이 4개월 남짓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곳에 가면 영월 읍내 서강 건너편의 울창한 솔밭을 볼 수 있다.

단종이 이곳 청령포에 오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1453년 10월,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황보인·김종서를 격살한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세조는 1455년에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세조 2년(1456)에는 단종의 복위를 꾸미다가 실패한 사육신(성상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의 죽음이 잇따랐다. 세조는 1467년에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이유로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잡아들이고,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귀양을 보냈다.

서울에서 출발한 나의 애마는 단종의 발자취를 따라 청령포 주차장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선착장에는 평일인데도 청령포에 들어가기 위해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영월 땅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온 것은 올해가 처음이지 싶다. 영월은 단종으로 인해 역사의 도시로 확실하게 거듭날 것이다. 손님을 가득 실은 배는 수심이 깊은 물 한가운데에서 선체를 돌려 반대편에 닿는다. 초봄이라 날씨가 맑아 좋았다.

단종어소에 도착하니 단종이 머물렀던 기와집과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했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어 반가이 손님을 맞이한다.

단종어소에 도착하니 단종이 머물렀던 기와집과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했던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어 반가이 손님을 맞이한다. 1년 전에 서울로 가는 길에 들렀을 때는 외로운 집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천만 영화 때문인지 사람들로 만원이다.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단종이 이 광경을 본다면 흐뭇하실 것이다. 단종어소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2000년 4월 단종문화제 때 지은 것이고, 원래의 집은 단종 사후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아 무너졌다고 한다.

청령포에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송림들이 단종어소를 지키고 있다. 그중에서도 관음송(觀音松, 천연기념물 제349호)은 수령 600년으로 키가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소나무이다. 전해지기로는 단종이 유배 온 것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은 소나무라 해서 볼 관(觀)자에 소리 음(音)자를 붙여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관음송을 지나 산에 오르니 망향탑이 눈길을 끈다. 단종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심히 돌을 쌓은 것이 탑이 된 것이리라. 단종은 14세 때인 1454년에 송씨(宋氏)를 왕비를 맞이하였다. 그녀가 바로 정순왕후이다. 아내와의 3년 남짓한 신혼생활도 이곳 청령포로 귀양을 오면서 끝나고 말았다. 단종은 세상과 격리되어 이곳에서 쓸쓸하게 귀양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왕방연 시조비는 청령포에서 볼 수 있었다. 청령포 솔밭을 다시 돌아서 선착장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가까웠다.

나의 애마는 영월 읍내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다슬기 식당가로 가는 길에 관풍헌에 들렀다. 이곳은 청령포에 홍수가 나자, 단종이 머물렀던 관아의 객사 건물이다. 동헌을 비롯한 관청 건물은 다 사라지고 지금은 객사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 관풍헌 길가 쪽에는 자규루(子規樓,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라는 2층 누각이 단종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다. 단종은 이곳에 올라 자규를 노래한 시와 사를 남기고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오후 5시)에 세상을 떠났다.

한 마리 원한 맻힌 새가 궁궐을 떠난 뒤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그림자 푸른 산속에 깃들었다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나 잠 못 이루고 假眠夜夜眠無假
끝없는 원한은 해마다 다하지 않네 窮恨年年恨不窮
새벽 산마루에 자규 울음 끊어지고 달빛은 밝은데 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것 같은 봄 골짜기 낙화는 붉구나 血流春谷落花紅
하늘은 귀먹어 아직도 애끓는 나의 호소를 듣지 못하는가 天聾尙未聞哀訴
어이하여 근심 많은 이의 귀만 밝게 하는가 何乃愁人耳獨聰

이 시는 어린 단종이 유배를 떠나온 뒤에 자신의 원통한 심정을 자규란 새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자규는 불여귀(不如歸, 돌아갈 수 없네)라고 불리는 새로 주로 밤에 운다고 한다. 자규의 울음 소리도 그친 야심한 시각에 단종은 달빛에 비친 붉은 낙화를 본다.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등된 단종은 훗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지은 시가 아닌가 싶다.

장릉은 영월의 상징적 문화유산이자 강원도 산골에 있는 유일한 조선의 왕릉이다. 수도권에 있는 조선의 왕릉과 달리 이곳 장릉은 봉분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영월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필자는 청령포에서 가까운 장릉에 도착하였다. 장릉(張陵)은 중종 11년(1516)에 왕릉의 모습을 갖추었고, 숙종 24년(1698)에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이름하였다. 장릉은 영월의 상징적 문화유산이자 강원도 산골에 있는 유일한 조선의 왕릉이다. 수도권에 있는 조선의 왕릉과 달리 이곳 장릉은 봉분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더없이 좋았다. 특이하게도 장릉에는 장소가 협소해서 그런지 몰라도 무인석(武人石)이 없다. 전해지기로는 무신 세력을 등에 업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무인석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단종은 살아서는 가장 외로운 왕이었으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왕이 되었으니,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장릉 가는 길은 솔숲으로 되어 있어 아늑한 정취가 느껴진다. 장릉에서 내려오는 길은 입구로 가는 길옆으로 빠지면서 시작된다. 능에서 내려와서는 오른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단종에게 의를 지킨 충신과 억울하게 죽은 여인과 노비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이 있다. 장판옥에는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위(宦者軍奴位)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 총 268인의 이름이 긴 널빤지에 새겨져 있다. 세조 당시에는 단종의 시신마저 거둘 수 없었으나 30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을 장판옥에 새겨 기린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엄흥도정려각(嚴興道旌閭閣)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필자는 마지막 답사지인 왕과 사는 남자를 만나러 갔다.
영월 호장(戶長)인 엄흥도(嚴興道)는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업고 산속으로 들어와 이곳에 매장하였다. 백성을 품은 단종은 끝내 백성이 품은 왕이 되어 이곳 야산에 묻혀 있다. 엄흥도정려각(嚴興道旌閭閣)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필자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엄흥도의 이야기를 방문객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이곳에 사람들이 몰려든 까닭은 무엇일까?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들이 자신을 위한 정치를 할 때는 오명을 남겼지만, 약자를 위한 정치를 할 때는 세세토록 존경을 받아왔다. 단종은 비록 짧게나마 왕으로 있었지만, 백성은 그를 잊지 않았다.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는 8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인생을 마무리하였다. 죽어서도 지아비를 잊지 않은 그녀는 사릉(思陵)이 되어 영월 땅을 바라보고 있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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