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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철 교수의 문화기행]산과 강, 바다의 도시 삼척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 승인 2026.05.13|(341호)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이번 답사는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삼척 장호항에서 출발하였다.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나폴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말피 해안도로를 끼고 있어 드라이브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절경을 보여준다. 삼척에는 아말피 해안도로와 유사한 이사부길(새천년해안도로)이 있기에 나폴리라는 명칭이 붙었을 것이다.
장호항을 벗어나기 시작한 필자는 나의 애마를 도로 옆 언덕 위에 잠시 멈춰 세우고 해안선을 바라본다. 눈맛이 시원하다. 끝없이 일렁이는 파도가 은빛 모래밭에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왔다가 간다.

초곡항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주차도 편리하고 입장료도 무료이다. 이곳에 있는 초곡용굴촛대바위길은 혼자만 보기 아까운 동해의 보석이다. 깨끗하게 정비된 데크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이곳이 과연 신선이 쉬어가고 구렁이가 용이 되어 승천할 만한 장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파른 절벽으로 이어진 잔도길은 왕복 1.4km여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이곳은 무려 60여 년간 군사경계지역으로 지정돼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가 2019년 7월에 일반인에 개방되었다고 한다.

제1전망대에 오르니 아득한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진다. 제2전망대를 지나노라니 11m 높이의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는 바닥 일부가 유리가 깔린 스카이워크로 되어있어 청록색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필자는 용기를 내어 한가운데로 걸어본다. 파도소리는 들리지 않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맥박도 평소와 다르게 불규칙적으로 뛴다. 하늘을 걷는 듯한 재미를 잠시 맛본 필자는 드디어 촛대바위에 이르렀다. 동해시 추암해변에도 촛대바위가 있는데 용굴촛대바위보다 조금 커보인다. 기암괴석 위에 우뚝 솟은 용굴촛대바위 모습은 실로 자연의 백미(百媚)였다. 촛대바위 옆으로는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바위가 피라미드처럼 생긴 바위 정상에 있는데 눈을 크게 떠야만 볼 수 있다.

기암괴석 위에 우뚝 솟은 초곡용굴촛대바위 모습은 실로 자연의 백미(百媚)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졸업 후 50년 기념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어린 시절의 모습은 남았으리라! 어부가 구렁이를 정성껏 제사를 지내 용이 되게 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용굴까지는 아쉽게도 갈 수 없었다. 태풍피해 공사로 인한 것인데 낙석의 위험이 있어 출입을 금하고 있다. 삼척시가 통행을 제한했던 용굴촛대바위길은 2026년까지 연장 공사가 예정되어 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더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다. 촛대바위와 용굴을 비롯한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즐비한 이곳은 예부터 ‘해금강’이라는 애칭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해안 절경의 끝판왕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공양왕은 1392년 4월 4일에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초곡항을 빠져나온 나의 애마는 근덕면 궁촌리 178번지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의 묘소가 있다. 공양왕릉 입구는 한산하였다. 돌계단을 오르자, 네 개의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양왕릉은 삼척시뿐만 아니라 경기도 고양시에도 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공양왕은 1392년 7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개경에서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태조 3년에 두 왕자와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공양왕이 생을 마감한 장소는 이곳 삼척이다. 그러나 『중종실록』에 따르면 공양왕릉은 고양에 있다고 했으니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공양왕은 1392년 4월 4일에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고자 하였다. 그런 그에게 단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1392년 이성계가 사냥하다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였다. 공양왕은 정도전, 조준 등을 귀양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성계를 축출하지는 못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이성계를 배반할 수 없었거니와 세력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였으나 공양왕은 망설임으로 인해 실기한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게도 고려 왕조의 멸망이었다.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삼척 기행의 으뜸은 오십천 벼랑 위에 한 폭의 그림으로 남은 죽서루(竹西樓)이다. 삼척 죽서루는 보물로 있다가 2023년 12월 28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여담이지만 문화재청에서는 2021년 11월 19일부로 국보 번호 지정제를 폐지하였다. 그 이유는 문화재 서열화라는 오해를 없애기 위함이다. 이제는 국보 몇 호라는 말 대신에 ‘국보 삼척 죽서루’라고 불러야 한다.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 국보로 승격된 유일한 곳이자 삼척의 자부심이다.

주차장에 나의 애마를 쉬게 한 필자는 동해안의 행정 중심지인 삼척도호부 관아지로 걸어갔다. 관아지 입구를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죽서루가 보이기 시작하고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을 가로질러 죽서루에 가까이 가니 기둥들의 모양이 제각각이다. 이곳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는 그랭이질 기법을 활용하여 죽서루를 지었다고 한다. 그랭이질 기법이란 자연석 주춧돌 위에 울퉁불퉁한 면에 맞춰 기둥의 아랫부분을 정교하게 깍아내어 밀착시키는 공법을 말하는데, 우리의 옛 선조들은 빼어난 풍광을 좀 더 가까이서 즐기기 위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이곳에 누각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자연주의 건축을 예증하는 것으로,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갔던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죽서루에 오르니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곳은 왕으로부터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머물면서 시와 비문을 남겼다.

죽서루에 오르기 위해 왼쪽 오르막길을 걷다가 구멍이 뚫린 바위를 발견하였다. 용문바위로 알려진 이 바위에는 사후(死後) 호국용이 된 신라 문무왕의 흔적이라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죽서루를 방문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죽서루에 오르니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편액이 보인다. 이곳은 왕으로부터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머물면서 시와 비문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한 사람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6~1682)이다. 1660년에 삼척 부사로 부임한 그는 삼척 시민을 사랑하여 ‘동해송(東海頌)’을 지어 수해로부터 마을을 지켜줬다고 한다. 애민 정신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죽서루에는 그가 남긴 ‘第一溪亭(제일계정)’ 현판이 남아 있다.

죽서루를 그림으로 남긴 조선시대 인물로는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외에도 관호 엄치욱, 표암 강세황이 유명하다. 강릉이 고향인 율곡 이이는 “온갖 인연 모두 떨쳐버리고 긴 낚시대 들고는 푸른 절벽 서쪽 물가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와 놀아보리”-죽서루차운(竹西樓次韻)이란 글을 남겼다. 이곳에서 선비들은 여럿이 어울리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풍류를 즐겼으리라! 과거와의 시간이 공존하는 죽서루에 잠시 누워본다. 송강 정철도 『관동별곡』에서 관찰사의 출장 일정이 없었으면, “그냥 여기 눌러살까나”라고 말했다고 했는데, 죽서루에 와보니 그 심정을 알 것만 같다.

죽서루의 아름다움은 절벽 맞은편에서 바라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죽서루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나의 애마는 삼척시립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죽서루가 서 있는 절벽 아래로 삼척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파란 물이 보인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누구나 이곳에 오면 누각을 지었으리라! 오십천 벼랑 위에 세워진 죽서루는 이제 삼척 시민들의 문화적 자부심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유채꽃은 제주도에 가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맹방유채꽃축제에 와보니 노란 꽃의 향연이다.

태백산맥에서 발원한 오십천을 따라 나의 애마는 바닷가에 있는 맹방유채꽃축제 행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채꽃은 제주도에 가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노란 꽃의 향연이다. 삶에 지친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잠시 시름을 접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알고 이곳을 찾았는지 연인들의 사진 촬영이 한창이다. “아빠, 빨리 와!”라고 외치는 어린 자녀들의 모습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느껴진다. 부러움을 안고 나의 애마는 다시 일터인 서울로 출발했다.

 

음영철 삼육대학교 글로벌한국학과 교수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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