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먹고 집을 나섰는데 진도터미널에 도착하고 나니 밤 9시다. 버스를 갈아타면서 대기하던 시간도 길었고 연휴 탓인지 고속도로 상황은 답답하기만 했다. 열두 시간 만에 도착하고 나서 터미널 출구에서 속말을 했다. ‘여기 오는데 열두 달이 걸렸구나’.
팽목항으로 들어가는 막차는 이미 끊긴 뒤였다. 터미널 근처 여관에 배낭을 내려놓고 식당에서 국밥 한술에 소주 한잔씩 털어 넣으며, 버스 안에서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책을 펼쳤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육성기록집(『금요일엔 돌아오렴』)이다. 몇 달째 펼쳐보길 미루다가 이번 길에 차분히 ‘그들의 육성(肉聲)’을 들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놈 때문에, 옆좌석 승객 눈치가 보여, 결국 접어버렸다.
“나는 평생 사랑하면서 그렇게 살았는데...이것만큼은 절대로 못하겠어요. 그래서 용서 못하겠다고...(교황님의) 정의를 위해 물러서지 말라... 그 말 한마디만 마음에 꽂혔어요. ‘아, 그래. 미워해도 되는구나’...”
“미치겠는 거야. 미치겠는 거야. 드러누워도 눈물이 나고 서 있어도 눈물이 나고...”
“처음엔 내 자식 일이라서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서 포기가 안 돼요. 여기서 포기해 버리면 나라가 버린 내 자식을 부모가 또다시 버리는 셈이니까. 죽어서 내가 우리 애를 어떻게 봐요.”
종이 위의 검은 글자들이 토해내고 삼켜내기를 반복한다. “(아이들이 물에서 나오면) 그게 부러워요, 거기에선. 그리고 서로 축하를 해요. 이게 말이 돼요. 그런데 그래요. 그러니 내가 미치겠는 거에요. 내가 왜 이게 감사해요. 도대체 왜.”
작가 중의 한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그는 여러 번 크게 통곡했다. 온 집안에 그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가슴이 쪼그라들 것 같이 아프다는 그의 슬픔이 전해져 한참을 함께 울었다. 그는 증오와 분노, 그리움과 결연함을 넘나들며 감정을 완전히 터뜨렸다가도 다시금 가다듬기를 반복했다”고.
이튿날 진도터미널을 떠나는 버스 안, 왠지 ‘외지사람’ 같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같은 곳에서 내렸다. 팽목항. 사고발생 382일째인 5월 2일, 주말임을 감안해도 팽목항의 방문객 규모는 내 예상을 웃돌았다. ‘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구나.’ 바다를 향해 서서 기도하는 이들, 걸어가며 눈시울을 훔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계속 들어온다. 304명 희생자들의 영정(실종자 9명은 이름만 적혀 있다) 앞에 마주 서는 분향소에서는 흐느낌이 이어졌다.
분향소 맞은편 천막에서는 미사가 진행중이었다. “근처에 놀러왔다가 죄스러운 마음에 들렸다”는 중년 남성, 단체여행 중에 미사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들, 전주에서 삼보일배(三步一拜)하는 유가족을 보고 나서 찾아올 것을 결심했다는 젊은 남녀 한 쌍 등이 돌아가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신부(神父)님이 말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가 중요하지요. 실천할 분은 실천을 하시고, 기도할 분은 기도를 해주세요.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다면 기도와 실천을 함께 해주세요.”
아직 9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고창석, 양승진, 이영숙,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권재근·권혁규 부자. 1년 넘게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권오복(권재근 씨의 형)씨의 숙소에서 잠깐 이야기를 들었다. “조속히 인양해야 하는데, 4월에서 6월이 골든타임이에요. 7월부터는 비, 태풍이 올 거고, 그렇게 가을, 겨울이 오면 올해는 그냥 지나가요. 이 좋은 날씨에 탁상공론만 하고 있으니...” 더욱 아픈 건, “실종자 가족들은 큰 소리도 못 낸다”는 이야기, “(정부에) 밉보이면 안 되니까”라는 이야기다.
팽목항을 찾아간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다녀온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공감(共感)’을 원해서.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원해서. 팽목항의 신부님이 이야기했듯이, 중요한 건 “지금껏 뭘 했냐”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이니까. 신부님의 ‘기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서 읽었던 베트남전쟁 이야기가 번뜩 생각났다. 돌아와 찾아보니, 리영희 선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동안 미국 군대의 포탄과 고엽제와 기총소사로 수없이 죽어간 베트남인들의 죽음과 고통과 눈물을 어느 하룻밤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중략)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취했어도, 고통받는 베트남인들을 생각하면서 분노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잠자리에 든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대화』 p.339)
리영희 선생은 10여년 이상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만이라도, 좀 더 가능하다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자는 것. 돌아오지 못한 9명, 전체 희생자 305명, 유족들, 생존자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덧붙임] 사고 1주년이던 4월 16일 즈음을 빼고도 팽목항 분향소에는 하루 1백명에서 많게는 1천명까지 찾아온다고 한다.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왕복 운행하는 버스는 매일 운행되고 있다.
* 세월호 인양촉구 서명운동 petition.sewolho416.org
이창조 기자 redfrog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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