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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효문 전교조 강원지부장 |
정현석은 한성의 6조보다는 지방 목민관으로 근무한 이력이 많았다. 고성군수를 시작으로 진주목사, 김해부사, 동래부사 등을 거쳤다. 동래부사 시절에는 아직 역사적으로 규명되지 못했지만 이른 바 ‘동래무예학교’를 만들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원산학사에 대해 “무예는 동래부(東萊府)의 규례를 본받아 출신(出身)과 한량(閑良) 200명을 선발하고, 별군관(別軍官)을 처음으로 두어 달마다 의무적으로 시험을 보아 시상(施賞)하였습니다”라고 기술했다. 원산학사의 무예반이 동래부의 학교와 같다는 것이다.
정현석은 근대교육 뿐만 아니라 지역문화 기록자로도 이름을 남겼다. 진주목사로 재직 당시(1867~1870) 그는 「교방가요(敎坊歌謠)」를 지어 진주지역 문화의 일부를 기록했다. 훗날 「교방가요」를 참고해 한국전쟁과 근대화를 거치며 사라져가던 진주 지역 무형문화를 복원할 수 있었다. 「교방가요」에는 정현석의 집안이 대대로 횡성에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1883년 덕원부사 재직 당시에는 서세동점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민과 힘을 합쳐 원산학사를 설립한다. 문예반, 무예반이 설치되고 전통학문과 함께 수학, 각종 기기, 농잠, 광산채굴 등 신식학문도 가르쳤다. 민관공동 설립이라 사립학교로 분류된 원산학사는 초중등교육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가 1904년 원산학교로 개편된다. 공립이 된 원산소학교는 일제강점기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근대교육 성립에 이바지한 정현석이 개화파가 아닌 위정척사론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갑오농민전쟁(1894) 당시 황해도감사로 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묘소는 횡성군 공근면 학곡리 금판촌 뒷산에 있다.
김효문 전교조 강원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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