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게 한반도 전역에서 식량구실 톡톡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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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영희 님(63. 공근면 상창봉리) |
| 토종돼지감자(아래 왼쪽사진). 시중에서 많이 판매되는 수미감자와 달리 보라색이며 눈이 많고 짜름한 모양새를 가졌다. 집둘레 비탈의 토종개복숭아(아래 오른쪽 사진). 토종들깨의 어린 잎 뒷면은 초록색이다(아래 사진). |



배영희(63세)님은 공근면 상창봉리 ‘우리별 천문대’ 바로 위쪽에 산다. 40년 전 마을에 깃들 때처럼 지금도 버스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다. 아들을 낳고서부터 농산물을 이고 들고 좁고 긴 오솔길을 걸어 나가 홍천 장에 가는 버스를 탔다. 횡성으로 다니는 버스가 늘어나자 20년 전부터는 횡성 장으로 팔러 다니는데, 이제는 파란색 마티즈를 끄니 훨씬 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오솔길이 포장됐다 하더라도 오는 차를 만나면 피하기가 어렵고 겨울에는 응달이 져서 운전하기가 나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영희님 집 둘레 논에는 벼이삭이 여물어가고, 앞쪽 비탈 밭으로 올라가니 토종 들깨와 고추, 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참깨와 올콩은 베어서 한쪽에 있고, 돼지감자를 수확한 자리에 배추를 심어놓았다. 비탈 밭 두 이랑에 심어놓았던 돼지감자가 배영희씨가 40년 동안 지켜오고 있는 토종종자였다. 밭에 다녀온 뒤 우리는 마당가에 앉아, 돼지감자와 분홍감자를 보며 얘기를 나누었다.
요즘은 뚱딴지와 구별하느라 ‘자주 감자’라 하지만 원래는 예전부터 ‘돼지감자’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모두들 돼지감자를 심었는데, 나중에 나온 흰 감자인 ‘수미’나 ‘남작’보다 잘 달리고 알도 좋다고 한다. “우리 친정에는 형제들이 11남매나 됐어요. 어머니가 돼지감자 한 다라를 내주시면 이걸 셋이서 까야 하는데, 큰 놋숟갈을 시멘트 바닥에 숟갈 끝을 갈어. 그걸로 감자껍질을 까면 하얀 녹말가루가 튀어서 하얘. 서로 쳐다보며 웃었어요.”
1960년대 시골은 옥수수가 귀해서 많이 심지 못했다. 논이 조금 있어 추수해서 겨울까지 죽을 쒀먹어도 여름까지 갈 수 없던 시절, 여름에는 밀과 보리와 감자가 주식이었다. 돼지감자는 눈이 많고 색깔이 짙은 보랏빛에 위쪽으로 유달리 싹이 많이 모여 있다. 눈이 많아 껍질을 까기 힘들었던 돼지감자는 이후 껍질이 하얗고 까기 좋은 신품종 감자에 밀려 거의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배영희씨는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 돼지감자를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한때는 열 박스씩 캐기도 했지만 올해는 두 박스 정도만 나오게 심었다. 돼지감자는 양력으로 3월 29일이나 30일에 꼭 심어야 하고, 심을 때 퇴비와 검은색 복합비료를 섞어 비닐을 씌어 심는다. 위쪽에 모여 있는 싹 부분은 아예 도려내고 큰 감자는 몇 조각, 작은 감자는 두 조각을 내거나 통으로 심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면 꽃을 쳐주고, 감자 줄기가 많이 나오면 세 네 줄기만 되도록 솎아주면 된다.
“돼지감자는 단단해. 여느 하얀 수미 감자는 반찬을 해도 부서지는데 얘는 단단하면서 달짝지근한 맛이 달라. 녹말을 하면 쌀로 만든 송편 같이 하얘요. 속에 팥이 다 보여요.”
돼지감자는 보라색으로 눈이 많아 껍질을 깎기 어렵고 짜름한 모양인데다 눈 부분이 더욱 검어서 흉측하게 보이기도 한다. 시장성에 밀려 사라졌지만 약효는 더욱 좋아서 요즘에는 당뇨나 고혈압에 좋다고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배영희님의 친정어머니도 돼지감자를 심으셨다고 하니, 돼지감자는 한반도 전 지역에서 100년 넘게 식량구실을 톡톡히 해온 셈이다.
배영희님에게 ‘돼지감자’는 어떤 의미일까. 홍천이 고향인 배영희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모님들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다녔던 교회에서 이웃 마을의 남편을 만나 스물 셋에 결혼했다. ‘기독교인은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야 바르게 산다.’고 산골오지의 논밭을 사주며 정착하라 했던 시부모님의 뜻에 따라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주말학교 교사를 하고, 횡성 상창봉리로 와서도 동네 아이들을 모아 기독교 정신을 심어주는 일도 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의 가난하고 정직한 삶이 읽혀졌다. 그 삶 속에는 1994년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는 독거노인 방문 봉사활동도 포함되어 있다.
돼지감자를 버리지 못하고 지켜오는 것은 부모의 뜻을 이어 평생 정직하게 살아오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새품종이라면 무조건 씨앗을 바꾸는 요즘, 배영희님은 자그마한 바람이 있다.
“옛날부터 하는 거니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신품종이 나온다고 해도 맛이 떨어져요. 내가 사는 날까지 한 집이라도 더 심을 수 있으면 좋지 않나. 근데, 새로 나온 게 좋다하면 다 거기로 몰리더라고. 우리 옛날 어려서부터 추억이 남아있는 걸 지키는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좋겠어요. “
돼지감자는 겨울에 땅이 얼기 전에 씨앗보관을 잘해야 한다. 무처럼 구덩이를 깊이 파서 묻어두고 봄에 심으라고 일러주셨다. 맛도 보고 씨앗으로 하라며 처음 보는 분홍감자도 주셨다. 마음 가득 따뜻해지며 나오는데, 집 둘레에서 자라는 토종국화며 차조기, 비탈 밭에 심어놓은 개복숭아 나무가 어른거렸다.
횡성희망신문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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