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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우사진관 김광수 전 횡성문화원장 |
인터뷰를 하러 뚜레쥬루 2층에 있는 백우사진관 계단을 오르며 사진관에 가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되었나 생각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적어도 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놓쳐버렸는지를 알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백우사진관을 찾았다.
-백우사진관을 언제부터 했나요
“1944년 해방전에 아버지가 사진관을 열었으니 만 73년됐어요. 흰 백에 벗 우자, 깨끗한 친구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었는데 상호를 모두 한자로 쓰던 때여서 처음 이름은 백우사장이었어요. 옛날에는 사진관을 사장이라 불렀지요. 아직도 세무서에는 백우사장으로 등록되어 있어요.
아버지는 남의 점포에 가서 기술을 배운게 아니라 통신강의로 사진기술을 독학으로 익혔는데, 아버지가 처음에는 신광이라는 사진관에서 4~5년 일하면서 월급모아서 자기 사진관을 열은 거죠. 처음 시작한 곳은 옛날 공회당이 있었던 근처인데 지금의 군청민원실 앞 주차장 자리에 공회당이 있었고 그 위쪽에 측량사무실 있는 곳이 처음 자리에요. 그런데 6.25전쟁 때 폐허가 되어 다 부서져서 집을 새로 짓지 않고 집이 남아 있는 이리로 왔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사진관을 해오고 있어요.
백우사장이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백우사진관이라고 한자로 썼다가 한글간판을 달았죠. 저는 옛날처럼 한자로 된 간판을 쓰고 싶은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한자를 잘 모르고 영어가 안들어가면 촌스럽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보다 오래된 100년 된 사진관, 4대에 걸친 사진관도 00사진관이었다가 00스튜디오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꿨어요. “
-들어오면서 보니 1980년에 지은 건물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지금 건물은 1980년에 내가 지은 건데 군대에서 벙커 짓던 실력으로 지어서 튼튼하긴 한데 모양이 없어요. (웃음) 몇 년 전에 횡성군에서 도시환경 정비 사업을 한다며 외장을 드라이비트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난 안했어요. 유럽이나 일본을 가보면 오래된 건물들은 자기 업종에 맞는 자기 개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획일화된 도시는 죽은 도시잖아요. 그런데 군에서는 드라이비트가 아니면 지원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 집만 빠졌어요.“
-대를 이어 사진관을 하는 만큼 사진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사진은 오래되어도 진실을 왜곡시킬 수 없는 진실성이 있어요. 신문기사의 사진이 그 기사의 내용을 증명하는 증명사진 역할을 하는 것처럼. 옛날에 아버지가 찍으신 사진을 보면 우리 부모님 이런 어려운 속에서 살았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죠. 횡성에서 신탁통치 반대하는 시가행진이 있었고, 군청이 옛날에는 지금보다 높이 있었고 그 아래 광장에서 궐기대회도 있었고... 모두 옛날 사진 속에 남아있어요. 어렸을 때 고추 내놓고 찍은 백일사진 속 그 모습으로 되돌아갈 순 없지만 내가 이런 모습으로 태어나 이런 모습으로 살았구나 하고 알게 되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사진과 함께 하면서도 사진의 진실성, 기록성 이런 것을 몰라요.”
아기앨범, 졸업앨범, 가족앨범에서
세상변화 느껴
-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느낀다고 했는데
“많은 것이 변했죠. 3층은 아기촬영장인데 4년째 아기촬영이 없어요. 출생하는 신생아도 많지 않지만 산부인과도 없으니 산모들도 원주에서 출산을 해요. 지금 3층은 아버님이 사용하셨던 카메라 등을 보관하는 창고삼아 쓰고 있어요.
학생 수도 줄어서 졸업앨범의 주문량도 줄었어요. 성북초등학교의 경우 지난해 98명이었는데 올해보니 74명으로 줄었어요. 옛날에는 횡성에 학생이 많았죠.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반에 64명씩 4개반으로 콩나물교실이었는데, 중학교 다닐 때보니 초등학교는 교실이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이가 없어서 학교가 폐교돼요. 우천,청일,갑천초, 안흥초는 졸업생이 워낙 적으니 졸업앨범을 아예 못만들죠. 졸업생이 10명도 안되니...간혹 2장짜리로 졸업앨범을 만드는 경우는 있지만...“
가족사진에서도 변화를 느끼죠. (벽에 걸려있는 한 가족사진을 가리키며) 저 사진은 4대가 함께 찍은 거에요. 옛날에는 3대가 같이 가족사진을 찍고 그랬는데 요즘은 자기네 가족만 찍어요. 3대가 같이 가족사진을 찍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대리운전 협동조합이나 원주 의료생협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이렇게 잘 돌아가고 있었을까. 어려웠던 옛날에는 서로 희생하고 배려하고 그랬는데 오히려 생활이 풍요로워진 지금은 그런게 없어요.“
-사진관을 오래했는데 그동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는지
“옛날에 신혼예식장이라고 사진관 안에서 예식을 했어요. 옛날엔 큰 공간이 많지 않았고 지금처럼 하객이 많은 것도 아니고. 송강루가 지금 아가방 자리에 있었는데 예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한그릇 먹는게 잘 대접받는 거였죠.
한번은 12시가 결혼식인데 2시가 되도록 신부가 안나타나요. 2시간이 좀 지나 신부가 얼굴이 퉁퉁 부어서 왔는데 알고 보니 아이를 낳느라 늦은 거였어요. 방에 불을 절절끓게 넣고 신부를 이불을 덮어 눕혀놓고 얼굴만 내놓게 해서 신부화장하고 드레스를 입혀 결혼식을 하긴 했는데... 신랑측에서 폐백을 안받겠다고 해요. 아무리 따져 봐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인데 신부는 억울하다고 울고. 신랑은 아니라고 하고. 결혼식하고 사진까지는 찍었는데...황당했죠. 진실은 당사자만 아는 건데 지금까지도 그 분들이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할때가 있어요.”
-전에는 집에서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죠
“많았죠. 그럴 땐 신부집에 미리 전날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결혼사진을 찍어요. 횡성뿐 아니라 양덕원도 가고 했는데 멀리 출장을 가야하니 자전거를 몰고 가죠. 자전거가 4대있고 직원도 많았아요. 자전거 뒤에 마그네슘이랑 카메라를 넣은 가방을 싣고 가는 거죠.
그런데 마그네슘 터트릴 때 동그란 화약을 넣고 누르면 터지면서 사진이 찍히는 건데 습기를 먹어서 안터지는 경우가 있어요. 불발이 되는 경우인데 그러면 땀이 나기 시작하죠. 촛불을 켜서 화약을 말려서 터트려봐서 뻥소리 나면 다시 사진 찍고 했어요. 고객들도 불발이 되면 ‘에이~’하면서도 기다려줬고. 마그네슘양도 계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감으로 적당히 맞춰 넣고 그랬죠. 그 시절에는 사진관 건물의 기와지붕이 뚫려있었어요. 전기가 나가면 무조건 마그네슘을 써야 히는데 연기가 빨리 빠져나가야 그 다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환풍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지붕을 뚫어놨죠.
가장 곤혹스런 경우는 카메라에 빛이 들어가 사진이 망가지는 경우에요. 옛날에는 사진을 찍을 때 나무로 된 판을 사용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게 아주 미세하게 갈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사진에 빛이 들어가서 사진이 망가지죠. 그런데 꼭 중요한 사진이 잘못되요. (웃음) 하객들 사진은 좀 망가져도 되는데 꼭 신랑신부 사진이 망가지는 거죠. 그럴 땐 되돌릴 수도 없어 속상해하면서도 다들 이해해주셨어요. 이해와 인심이 있던 시절이었어요.
-관공서와의 거래도 많았을 것 같다
“횡성군청과 경찰서가 사진을 뽑아갔어요. 경찰서의 경우 감식반으로 발령받으면 사진부터 배우죠. 사건사고 사진찍을 일이 많으니까. 강원도경찰청에서 필름이 횡성경찰서로 지급되어 오는데 품질이 좋았어요. 밀수품으로 뺏은 것을 보급하니까. 코닥이나 아그파. 후지 이런 것은 전부 밀수품이었죠. 우리는 큰 필름을 롤로 사와서 잘라서 필름통에 담아서 우리 상호를 붙여서 팔고. 사건사고나면 경찰이 찍어서 갖다주면 빼주고(현상) 했죠. 군청공무원들이 비가 많이 와서 농로 떨어지고 기반 손실된 수해현장 사진을 가져다 주면 17분 완성기계로 밤새 뽑아주면 공무원들이 서류에 사진 붙여 강원도로 피해상황을 보고했어요. 명절 전에 한꺼번에 결제해주고.”
횡성문화원의 윗사람이
아니라 앞사람이 되겠다
-문화원장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문화원장 맡게 되었나요
“개인적인 거지만 결혼상대를 조금 나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뭔가 퀄리티가 있어야 하는데 재벌도 아니고... 그래서 ‘작품사진을 통해서 이름있는 사진작가가 되면 사람들을 만났을 때 좋을 것 같다’ 생각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죠.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시니 나는 무임승차해서 지리산을 누비면서 낙조도 찍고 그렇게 사진을 열심히 찍어서 강원도에서 세 번째 초대작가가 되었어요.
그런데 문화원에서 이 지역의 예술인들을 키우려 안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리더가 돼서 문화원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도 하고, 우리 전통문화 계승하고 우리 삶을 문화적으로 좀 더 풍요롭게 하려고 했어요. 예총이 없었기 때문에 문화원의 리더가 되길 원한거죠. 취임사에서 제가 그랬어요 ‘제가 횡성문화원의 제일 윗사람이 아니라 앞사람이 되겠다’고.“
-문화원장으로 활동한 것 중 자부심을 느끼는 것과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문화원장을 8년 했는데 지금 문화원 프로그램의 60%가 내가 문화원장으로 있으면서 만든 거에요. 직원들이야 일적은 게 좋죠.(웃음) 그래도 직원도 늘리고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도 시작하고 여름방학 마지막 날엔 아이들에게 떡메치게 해서 떡도 만들어 먹고 연도 만들어보고, 문화교육수료식을 동짓날 해서 같이 팥죽도 나눠먹고 그랬죠.
동짓날 팥죽먹자고 오라하면 사람들이 옵니까? 옛날에는 동짓날에 팥죽이 액귀 쫏아낸다고 집에다 떠다놓고 그랬는데, 종교적인 신앙이 아닌 우리의 풍습입니다.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달집태우면서 소원빌고 그런게 우상숭배라고 보지 않아요. 조상님에게 제사지내는 것도 우상숭배가 아니고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이런 분들을 기억하면서 자손들이 모여서 그분들을 기리고 술 한잔 같이 나누고 그런건데...
민사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 명사특강은 민사고 아이들이 3년간 횡성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그냥 보내기 보다는 횡성을 알리면 좋지 않나 생각해서 시작했어요. 10년 전만 해도 강사를 모셔오면 학생들은 집중을 안했어요. 그런데 횡성에 관현악단이 생기면서 청중으로서 학생들이 달라졌어요. 자신이 친구들이 무대에서 공연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강의도 집중해서 듣고 앵콜도 나오고 반응도 보이고. 처음엔 서울에서 연주단을 모셔왔는데 빨리 끝나서 갈 생각만 하고 그랬던 아이들이 바뀌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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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우사진관 3층은 사진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사진기로 가득했다. 사진은 김광수씨의 아버지가 사용했던 70여년 전의 사진기. |
제일 아쉬운 점은 향토사료관을 못만든 거에요. 문화원장으로 있는 동안 문화원답게 향토사료관도 있고 주민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계속 주장했죠. 지금 횡성군이 건립하고 있는 횡성문화원 및 작은영화관에 향토사료관을 둔다고 해요. 지금 아버지가 쓰시던 70여년 된 일제카메라도 보관하고 있어요. 지금 아이들이 보기 힘든 것들인데 이런 것들을 보관 전시할 장소가 마련되었으면 하죠.
지금 문화원 옆에 콘테이너 2개가 있는데 그 안에 문화원이 주민들로부터 기증받은 향토사료들을 보관했어요. 그런데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우니 사료들이 자꾸 망가져요. 망가지는 걸 보다 못해 기증했던 분들이 도로 찾아가기도 하고...사료관을 짓는다면 아버지가 쓰시던 카메라며 유리원판 같은 것을 기증해서 전시하고 싶어요.
또 예술인에 대한 배려를 너무 안한다는게 아쉽고 그걸 개선하지 못하고 임기를 마친게 아쉬워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침이건 저녁이건 테니스하는 사람 단 2명만 있어도 라이트를 켜요. 그런 점에 참 관대해요. 그런데 우리 연극단체나 예술단체들이 공연한다고 연습하려고 가면 안빌려 줘요. 탭댄스 같은 것은 마루에서 해야 하는데 구두에 쇠가 박혀있어 무대가 망가진다는 것인데 관심이 있다면 두꺼운 송판을 깔면 되죠. 그런데 무대 망가진다고 다 낡았는데도 대관을 안해주고... 문화예술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소외되는 거죠. 아무 때고 테니스고 풋살이고 축구,족구 불 켜놓고 하는데 정작 예술인들은 리허설할 때 잠깐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실정이에요. “
문화재단이 문화라는 새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했으면
-횡성군이 문화재단을 만든다고 한다. 문화재단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횡성에 제일 부족한 것은 전문가다. 전문가가 없다는 점인데 문화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고 문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 놔요.
문화재단공청회 때도 발언했지만 문화재단이 정치적 논공행상으로 변질되어 자기사람 심기가 되어선 안돼요. 그리고 문화재단이 직접 사업하지 말고 문화사업을 하는 단체들을 뒤에서 뒷받침해주고 밀어주는 후견인의 역할을 했으면 하고 이것을 조례로 만들었으면 해요. 실적을 내기 위해 사업을 하는 것은 지방의 문화발전에 도움이 안돼요. 그런 기관이 될까봐 걱정된다. 문화재단이 횡성에서 문화라는 새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횡성문화원은 예산편성권이 없다. 내년에 이런 사업을 하겠다고 올리면 위에서 승인해주면 군비 지원받고 도비 지원받고 그런 거다. 문화재단에는 일정한 예산이 배정될 텐데 어느 것이 더 시급한지 따지고 아주 공평하게 배분하고 뒤에서 북돋아주면 좋겠다. 문화단체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횡성의 문화로 소중히 보존하고 갈 가치가 있는 부분이 있다면
“횡성의 문화가 무엇이냐? 이건 문화고 저건 문화가 아니다 이렇게 나누기가 힘들다. 옛날에 동네마다 서낭당이 다 있었어요. 하찮은 서낭당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문화에요. 그런데 새마을안길 시멘트포장하면서 흉하다고 다 사라졌어요. 내가 늘 다니던 곳인데 마을안길 확장하면서 나무베어내고 없어지고... 사람들은 문화가 따로 있는 줄 아는데 우리 생활 속에 있는 것이 다 문화에요.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전통으로 이어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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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태우기, 지신밟기도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리가 소중히 보존할 문화입니다. 우리의 문화에 대해 군의 적극적 지원과 지역민의 관심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횡성희망신문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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