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67·여) 할머니는 “다시 결혼하자면 안 한다”며 까르르 웃으신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던 이성규(73)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이혼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아들딸 장가보내고도 이혼하고, 희한해 세상이….”라며 말끝을 흐리신다.

횡성군 우천면 법주리에 살던 김 할머니는 1965년 봄, 옆 동네 정암리에 살던 이 할아버지와 선을 봤다. 이 할아버지는 군대를 제대하고 26살이 되던 해. 당시로선 26살이면 노총각 소리를 듣던 때였다,
“4월쯤 누에 한창 받고 있는데 선을 보러 왔어. 선을 보고 약혼 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해서 약혼은 했는데, 통 얼굴 보러 안 오는 거야. 엎어지면 코앞인데 왜 못와. 그래서 내가 병신이라고 그랬어. 약혼했는데도 얼굴 보러 안 오니 이상한 소문만 돌고….식구는 자꾸 늘어나는 거야. 없던 시누이, 시동생 자꾸 생기고 시할머니 생기고 대식구가 되더라구.”
김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놀리는 게 재미있으신지 시종 까르르 웃으며 말씀을 이어간다.
두 분은 그해 12월 14일(음력) 혼례식을 올렸다. 김 할머니는 혼인신고를 하러 가서야 자신의 이름이 ‘김간난’으로 돼 있는 걸 알았다. 당시 출생신고를 대신하다 이름을 잊어버린 마을이장이 ‘김간난’으로 신고했던 것. 할머니 세대에 ‘간난’이라는 이름이 많은 이유다.
“12월에 시집와서 보름 만에 설 차례상을 차렸어. 아침저녁으로 집안 어른들께 문안드리러 다니고, 저녁에 이부자리 펴 드리고. 층층시하라 과일 하나를 놓아도 7접시를 놓아야 했으니 왜 시집을 왔나 싶더라고. 요즘 세상은 다 해주잖아, 남편들이. 우리 애들만 해도 아들이 부엌들어가서 다 같이 해, 우리 때는 그런거 없었어.”
30대 초반, 남의 논만 부치다 힘이 들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한남동과 봉천동은 당시만 해도 서울 변두리였다.
“쌀 한 됫박도 안 갖고 이불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갔어. 서울 간 첫날 주인집에서 쌀한바가지 얻어서 밥해먹었지. 사글세 살면서 노가다도 다니고, 시레기 얻어먹고 고생도 많이 했어.”
이 할아버지도 질세라 고생담을 늘어놓으신다. 아무렴, 할아버지 세대에 고생이 없었으랴.
“그때가 재미있긴 재미있었어. 농사 안 짓고 사니 좋더라구. 신랑이 벌어주는 걸로 사니 얼마나 좋아. 2~3년 살다 보니 여기 내려오고 싶은 맘이 없어져.”
김 할머니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시아버님이 병들어 농사를 못 짓겠다고 하니 어떡해. 내려와서 농사짓고 살아야지. 서울서 계속 살았으면 서울사람 되는 건데(웃음). 3년 상을 연속으로 7년간 겹상을 했어. 아침저녁으로 식사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에 제사 지내고... 하나도 힘든데 겹상을 놓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냐. 겹상 올리고 식전에 남의 일 다니려면 바쁘지. 초하루 추운 데서 여기서 울고 저기서 울고, 눈물이 다 얼어.”
한껏 고생담을 늘어놓으시는 김 할머니 옆에서 이 할아버지는 옛날 사진첩을 꺼내들고 추억에 빠지신다. 이 할아버지 앞에는 젊은 시절 훤칠한 미남 사진이 펼쳐져 있다.

“딸은 맏이한테 안 주려고 했는데 맏이한테 가네. 둘이 좋다고 하는데 어떡해.” 이 할아버지와 김 할머니의 자녀는 3남 1녀. 모두 출가시키고 두 부부가 행복한 노년을 보내며 고향을 지키고 있다.
이상규 기자 eco2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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