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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태진 전 군수 |
횡성한우 명품화사업에 대해 부정적인 축산농가도 없진 않았지만 반발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업을 통해 수정에서 사양, 판매에 이르기까지 축협을 통해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정확한 계측과 기준으로 소를 팔게 되어 농가에게 유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세한우를 키우게 되면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어 농가들이 큰 반발 없이 명품화사업을 받아들인 반면 축산유통 일을 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는 횡성우시장을 통한 거래와 함께 각 마을을 다니는 소장수에게 소를 파는 경우도 많았는데 노련한 소장수들은 소 값을 잘 쳐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저울도 없이 어림짐작으로 무게를 달거나 저울의 무게를 덜나가게 편법을 쓰기도 해서 농민들이 소 값을 많이 받기 힘들었다고. 소를 잘 키운만큼 축협에서 소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농민들이 더 이상 소장수에게 팔지 않으니 명품화사업이 반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농가들이 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품질 좋은 횡성한우를 생산해 낸다고 해도 사육기간도 길고 거세한우 효과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은데 횡성군은 명품화사업이 시작된 1995년 횡성한우 상표등록을 신청했다. 한편 한우명품계를 구성해서 전담직원을 배치하고 시범농가를 선정, 지원하는 등 횡성한우의 개량과 생산, 판매, 유통 등을 정비해나갔다.
-명품화사업이 시작된 이후 다양한 지원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축협과 농가들의 노력도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선 명품화사업의 효과라고 할까,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어떤 계기로 횡성한우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횡성한우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건 명품화사업이 시작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어. 가장 큰 계기가 된건 2005년 6월에 SBS TV에서 진행한 <생방송 러브콜 “우리명품 만들기”>라고 할 수 있지.
전국의 유명한 명품 특산품을 대결시키고 시청자들의 ARS전화로 심판받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횡성한우가 영덕대게와 붙어 이겼거든. 사실 처음엔 지더라구. 영덕대게야 옛날부터 유명했잖아. ‘아 이거 시원치 않네. 졌구나’ 그랬지.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쭈욱 올라가더라구. 여기서 이겨서 전국의 유명한 5대 명품이 대결하는 결선까지 나갔고 다시 또 이겼지.
처음에 영덕대게와 붙어서 이긴 뒤에 횡성한우를 찾는 소비자들이 엄청 많아졌어. 축협이 2003년 우천면에 연 횡성한우프라자는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야 할 정도였으니까. 축협판매장에도 횡성한우 사러 온 외지 손님들이 늘었고.
방송에서 전국의 내노라하는 명품들을 이기면서 횡성한우가 명품의 대열에 섰던 것 같아. 그 후에도 방송사들마다 다양한 방식의 프로그램으로 소개하면서 횡성한우의 명성이 확고해질 수 있었다고 봐. 그런 점에서 홍보는 참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야.
당시 횡성한우는 영덕대게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 결선에서 제주의 은갈치, 무안의 낙지, 산청의 흑돼지. 고창의 장어와 맞붙어 승리했다. 2위인 제주 은갈치가 4만 8461표를 얻은 반면 횡성한우는 7만 5654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명실공히 명품들을 이긴 명품으로 소비자들에게 인식되었다.
먹어보고 싶은 명품한우로 소비자들에게 알려지면서 그 해 9월에 열린 제2회 횡성한우축제는 밀려드는 방문객들로 고속도로가 정체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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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성한우를 명품으로 자리하게 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준 SBS TV의 <생방송 러브콜> |
※ 기사 정정/ 지난호 같은 기사 중 “보통은 30개월 정도면”에서 30개월은 24개월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
이용희 기자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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