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모 머쉬텍동충하초연구소장은 동충하초 연구의 살아있는 역사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뒤, 횡성군 청일면으로 이주해 와 버섯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일로 평생의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성재모 소장에게서 동충하초 연구자가 되기까지, 그리고 동충하초와 함께 한 30여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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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충하초 미세구조를 현미경으로 보고 있는 성재모박사. 사진 오른쪽은 다양한 동충하초들과 동충하초의 포자와 균사모습. 사진출처 성재모 페이스북 |
“머리가 나쁘니 성실하게 노력”
횡성희망신문 조만회 대표로부터 전화가 와서 받아 보았더니 나를 만나 말씀드릴 것이 있다고 하여 춘천에서 오는 길에 터미널에서 만나 사무실에 갔다. 희망신문 편집장인 이용희 님도 따뜻하게 맞아 주신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기다리는데 조 대표께서 말을 한다. 나에 대한 글을 희망신문에 싣고 싶다고 한다. 한번 싣는 거라면 써 준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이 편집장께서 10회 정도를 써 달라는 부탁이다. 이 제안을 받는 것도 나에게는 영광이지만, 그러나 망설여진다. 원래 과학적인 논문을 써 보았지만 신문에 기고한 적은 없기 때문에 사양을 하였지만, 지금까지 살아 온 것과 동충하초 인연을 맺은 것에 대하여 써 보내기로 하였다.
농촌의 어려움 보고 자라
학교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
나는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발산리 괴정부락에서 해방 전에 태어나 농촌의 어려움을 보고 자랐다. 부모님을 잘 만나 어려움이 없이 자랐지만 어린 마음에도 ‘농촌도 잘 살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움이 중요한데 면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는 4km가 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일곱살에 동네에서 나 혼자만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하지만 임천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이 일어났다. 학교는 가지 않고 동네에 모여 김일성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던 기억이 난다. 어수선한 환경에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한글을 초등학교 4학년에 깨쳤다. 다른 아이들은 전깃불 아래서 공부하고 학교도 가깝고 친구도 있지만 마을에서 혼자 학교를 다닌 나는 친구도 없고 학교도 멀었지만 그래도 즐겁게 학교에 다녔다.
당시 학교 사택은 초가집으로 되어있어서 지붕을 만들기 위해 볏짚을 지고 학교에 간 것도 잊을 수 없다. 여름이면 비가 많이 와서 집에 가려면 형들과 함께 커다란 내를 헤엄쳐서 건너가야 했다. 6학년 때는 좋은 중학교에 가겠다고 저녁까지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한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내 성적은 맨 뒤에서 몇 번째였다. 다른 아이들은 대전으로, 공주로 중학교를 가는데 나는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했다.
졸업 후 같은 면에 소재하고 집에서 조금 가까운 임천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시절은 내 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내 환경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전공별로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학생들도 공부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희망이 있다면 시골 중학교를 나와도 대전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환경이 어떠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나름대로 부지런히 공부에 정진했다. 그런 덕인지 그런대로 초등학교 때보다 성적이 상위로 치닫게 되었지만 사춘기였기에 생각하는 것도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만 다녔기에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정비도 되지 않은 논둑길을 걸으면서 ‘나의 희망은 무엇이며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전기도 없는 농촌을 일으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많다. 학교 전교생이 나아가 토끼몰이를 하는 일은 재미있었지만 학교를 짓기 위해 산에서 벽돌을 나르는 일은 내가 하기 싫어했던 일이다. 혼나던 일, 책을 보면서 소를 살찌우기 위해 풀을 먹이던 일 등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했다. 이런 것들이 배경이 되어서 심신이 성장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동네 형들은 전부 사범학교를 갔지만 나는 3년 동안 공부한 덕분에 대전고등학교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성적부진에 새벽4시 공부
지금까지 이어져
졸업 후 대전고등학교에 합격을 하여 부모님을 떠나 생활하게 되었다. 대전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은 내 인생에 하나의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고는 합격을 할 수 없었다. 입학을 하니 1학년 1반 담임선생님이신 조남호 선생님께서 수업 첫 시간에 칠판에 글을 쓰신다. ‘3합4락’. 하루에 3시간 자고 공부를 하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4시간 자면 원하는 대학교에 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한 달 후에 시험을 보고 그 성적 전체를 밖에 붙여 놓는다고 하신다.
시험을 보고 난 후 보니 내 성적은 전교 480명 중에 끝에서 몇 번째였다. 나는 키가 작고 얌전한 편이라 다른 학생들과 다툴 일은 없었지만 시골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기초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이 하숙을 하는 친구는 공부를 얼마 하지 않아도 성적이 좋게 나왔다. 나는 그때부터 ‘머리가 나쁘니 다른 사람보다 성실하게 노력하여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다. ‘그래도 부여 임천에서 대전까지 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공부를 부지런히 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아무리 공부를 하여도 기초적인 바탕이 모자라서 그러한지 성적은 3년 내내 뒤에서 머물렀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때 4시에 일어나는 버릇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횡성희망신문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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