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흘렀다. 전쟁으로 생겨난 장벽(障壁)은 길고 깊은 시간을 지나 넘을 수 없는 거대함으로 지금 우리 곁에 있다.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장벽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내일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횡성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보는 이 특별기획은 이 물음으로부터 출발했다. <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서울과 강릉, 양평, 원주, 춘천, 충청도 등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농업은 물론 상업과 광산업이 발달한 곳이었던 횡성은 6.25전쟁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 |
| ▲ 일제강점기인 1940년 횡성읍시가지모습.왼편에 보이는 큰 도로가 현재 횡성농협 앞 도로다. 당시에도 상당히 넓은 도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횡성군 민원상담관 유제호씨 아버님의 횡성남공립심상소학교(현 횡성초등학교) 제26회 졸업앨범에 있는 사진이다(1940년3월). 유제호씨에 따르면 아버님이 폭격으로 파괴된 집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발견해 보관해왔다고 한다. |
| ▲ 위 사진 횡성읍시가지의 현재모습 |
| ▲ 맨위사진 부분확대 |
1950년 9월 말일 경, 소년 김동수(12세)는 피난지인 원주시 호저면 동막리 동산 위에서 멀리 횡성읍에 있는 집들이 불타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읍내 중심지에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숨겨놓은 차량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횡성 전체가 불바다가 되는 것 같았지만, 미군 폭격기가 인민군을 쫒아낸다고 생각하니 어린 마음에도 안심이 되었다.
정부 기록에 따르면 같은 시기에 미 해병대는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유엔군은 남원과 담양을 탈환하고 광주로 진격했으며, 미국은 유엔군의 북진 계획을 승인했다. 10월 2일 국군 제 3사단은 38선을 돌파하고 양양을 점령했다. 미군기의 횡성폭격은 38선의 탈환과 유엔군의 북진과 같은 궤에 있었던 것이다.
횡성읍 상공을 벌겋게 물들였던 불길로 횡성읍 시가지의 많은 건물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횡성읍은 전쟁 전부터 여관과 식당들이 많았고 일본식 목조건물들도 많아 폭격의 피해가 컸다. 전쟁 직전 횡성의 모습을 전하는 사진은 찾지 못했다. 다만 일제강점기 1940년대 횡성읍을 담은 빛바랜 사진에서 전쟁 직전까지 제법 번화했던 횡성읍의 모습을 가늠할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횡성이 이렇게 번화한 모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요인에 더해 상업과 광산업이 발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횡성은 서울과 강릉, 양평, 원주, 춘천, 충청도 등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금강산의 장안사에서 열리기로 한 ‘제 1회 강원기자대회’가 교통이 편안하고 적당한 장소인 횡성군으로 바뀔 정도였다(1928년).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위치는 상업이 발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개성상인을 울린 ‘횡성상인’이야기도 횡성에 상업이 발달했음을 짐작케 한다. 상업의 발달로 현금거래가 활발해서일까. 횡성주민이 주범이 되어 정교한 기계를 사용해 지폐를 위조하려던 지폐위조단이 횡성경찰서에 붙잡힌 사건도 기록에 보인다.(1927년)
전쟁 직전인 1949년 횡성의 인구는 89,091명이었다.(표참조) 일제 강점기인 1928년 횡성인구는 58,000명 10,300호였는데 이 중 일본인 호수는 59호였다. 해방이 되면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해방 후에는 횡성에서 일본인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1949년 인구조사에서 횡성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6명으로 나타난다.
1920년대 각 국가들은 국제 경제 및 무역에서 국제 통화인 금의 확보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일본 역시 식민지 조선에 눈을 돌려 금광 채굴에 전력을 기울였다. 금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황금열풍이 불었다. 횡성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광산으로 1930년대에는 전 조선 굴지의 광업지가 되었다. 1934년 횡성의 대표적인 5개 광산의 노동자수는 393명. 1935년 횡성의 금, 은 광산은 40여광에 달하며 품질도 우수했다. 광산 주변은 주막과 음식점이 즐비하고 불경기를 벗어나 별천지를 이루었다.
| ▲ "불과 5개월간 횡성의 광산액이 10만5천원을 돌파"했다는 내용의 1934년 조선중앙일보기사. 당시 조선인의 하루 평균임금이 87전, 일본인이 1월84전임을 감안하면 횡성의 광산업이 대단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 (횡성이) 원주보다 서울과 강릉을 연결하는 중심이었지. 강릉을 가자면 횡성에서 묵어가야 해. 그리고 광산이 있어서 광업하고 관련된 사람들이 투숙했지. 그래서 여관업이 상당히 발달하고 지금 중앙의원 부근에 ‘관동상회’라는 물류센터가 있었지. 해산물이 여기 와서 원주,춘천,홍천 지방을 가져가지.”
횡성읍에서 나고 자라 어린 시절에 보고 들었던 일을 잘 기억하고 있는 김동수씨의 (76세) 기억이다.
![]() |
| ▲ 일제강점기에는 사진 오른쪽 교회자리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일본식호텔이, 교회건너편에는 건견장이 있었다고 한다. |
당시 횡성에는 일본식 호텔도 있었다고 한다. 김동수씨는 대동여중 입구 지금의 성결교회 자리라고 기억했다.
“ 일본말로 밤나무가 구리여. 일본사람 호텔하는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자기 채소를 호텔에 쓰고 언덕아래(현 장애인종합복지관 쪽)에 밤나무도 심었지. 밤나무 동산, 그걸 구릿고개하고 하는 거야. 그리고 군청 옆 지금 안골막국수 바로 위에 어수물이 있어서 횡성읍 사람들 모두 초롱으로 동이로 길어다 먹었지. ”
김동수씨에 의하면 일본사람이 운영했던 호텔은 해방이 되면서 현재의 횡성군청 뒤 보훈공원 자리에 있던 신사(神社)와 함께 분노한 횡성주민들에 의해 ‘때려부숴졌다’고 한다.
![]() |
| ▲ 횡성읍 안골막국수 위쪽에 조선시대부터 물맛 좋고 수량이 풍부하기로 소문난 어수물(일명 예수물)이라 일컫는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횡성주민들이 동이로 물을 떠다 썼지만 수돗물의 공급과 개발에 밀려 사라졌다. |
한편 해방 전, 원주에는 없지만 횡성에 있던 게 있었다. 누에고치를 스팀으로 찌면서 1차 가공을 하는 건견장이 지금의 대동여중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1차 가공한 고치를 본국으로 가져갔다. 당시 견사는 일본의 외화벌이 수출품이었다. 일본은 횡성은 물론 춘천 등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등 각 지에도 건견장을 두어 누에 생산을 닥달해 횡성의 각 초등학교마다 5,400G의 누에 생산을 강요하기도 했다(1942년).
“ 횡성에 공장 굴뚝이란 게 하나 있는데 건견장이 큰 게 있었어. 종사원들도 많았지. 횡성은 누에를 많이 쳤지. 특산물이지. 그리고 화전은 안흥, 강림 쪽에 많았고 횡성읍에는 없었어. 시내 쪽은 다 벼농사고 밭은 북천리 쪽이지. 콩, 감자, 옥수수, 피마자...이런 게 많았지. ”
피마자 역시 군수용품이었다. 군수품이었던 면화, 피마자, 송지(소나무 진)를 얻기 위한 일제의 닦달은 갈수록 심해졌고 심지어 토끼,고양이,개 가죽까지 배당하여 공출해갔다. 군용모피용으로 쓰기 위해서다. 일제가 수탈해 간 것은 군수용품 만은 아니었다. 부녀자의 노동력까지 동원하기 위해 횡성에만도 탁아소 7곳이 설치돼 만여 명의 어린아이를 보도록 했다.(1937년)
교통과 상업의 발달, 광산업과 식당, 여관업의 발달, 건견장 등 공장건물로 번화한 횡성읍의 외양(外樣)은 일본제국주의의 철저한 수탈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제의 잔흔(殘痕)들은 전쟁 전까지도 상당수가 남아있었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 사라져갔다.
<이용희기자. 오숙민객원기자>
※6.25전쟁을 겪은 횡성주민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관련 사료들을 통해 전쟁 당시 횡성과 횡성사람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지만 그 어떤 말로도, 세밀한 글로도 전쟁을 온 몸으로 받아냈던 이들의 기억과 아픔을 담아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온전히 횡성희망신문의 부족함 탓이다. 기꺼이 기억을 풀어내어 주신 분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용희 기자 yongy63@naver.com
<저작권자 © 횡성희망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외협력관, 6년 전 논란을 다시 꺼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