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흘렀다. 전쟁으로 생겨난 장벽(障壁)은 길고 깊은 시간을 지나 넘을 수 없는 거대함으로 지금 우리 곁에 있다.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장벽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내일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횡성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보는 이 특별기획은 이 물음으로부터 출발했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횡성군청 뒷산과 횡성성당 뒷동산에서 벌어진 집단 돌싸움은 해방 후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첨예한 의견대립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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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후 토지분배를 요구하는 데 지장을 찍어주었던 소작인들이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곤혹을 치른 것을 계기로 1948년 8월 15일 양측의 돌싸움이 벌어졌던 군청(사진왼편 큰 건물) 뒷산과 횡성성당(사진 오른쪽 끝 건물) 뒷동산의 모습을 가늠하게 해주는 사진. 사진 오른쪽 앞에 보이는 큰 건물은 횡성감리교회로 1959년 건축돼 돌싸움이 벌어졌던 당시에는 없었다. 이 사진은 고락홍씨의 <횡성30년 기록사진집>에 수록되어 있는 1960년대 횡성읍내 사진 중 일부로 횡성군 부군수로 퇴직한 유제호씨가 제공했다. |
해방 이후 전쟁 전까지 횡성읍에는 식당과 여관이 번창을 하고 있었다. 해방 1년쯤 지나자 북쪽 전력회사에서 오던 전기가 끊겼고, 횡성읍 중심지에만 전기가 공급되었다. 그래도 잘 사는 사람들은 전화기와 축음기, 선풍기, 라디오를 소유하고 있었고, 소뼈에 돼지털을 박은 일반 칫솔보다 고급인 플라스틱 대에 인조모가 있는 일제 칫솔을 쓰기도 했다. 김동수(76세)씨는 어릴 적 부모님이 지금 군지부 농협 자리에서 식당을 하던 일을 들려준다.
“우리 집이 전쟁 전에 식당을 아주 크게 했지. 그 다음에는 여관을 했어요. 장날이면 백반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와글와글 했지. 전쟁 직전에는 여관을 허니까 전기가 없으니까 램프가 20개는 넘어. 학교 갔다 오면 램프를 닦고, 어수물 길러오고, 여관 청소하고, 공원 뒤에 우리 밭에 가서 농사짓고 집안일을 엄청 도왔지.”
그래도 틈만 나면 남자 아이들은 군청 뒷산에 가서 병정놀이를 하고, 겨울이면 나무를 깎아 날을 달고 빙판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여자 아이들은 고무줄, 땅따먹기, 공기, 오자미 놀이를 즐겼다. 지금의 군청 별관 주차장 자리에 있던 횡성공회당은 해방 이후에 실내행사가 없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 세계와는 달리 어른들의 세상은 혼란과 기대, 무질서와 공포의 도가니였다.
실패한 미군정에 불만고조
친일파척결실패에 경제파탄
일본제국주의는 사라졌지만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잠정적으로 설치됐던 38선은 시간이 갈수록 소련의 영향력아래 있는 북한과 미국의 영향력아래 있는 남한의 정치적 대립구도로 굳어져갔다.
남한의 경우 일제의 통치조직이었던 일본경찰은 미군정에 그대로 흡수되고 오히려 더욱 세력이 강화되었다. 관료조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민들이 가장 기대했던 일본인 소유의 재산과 토지, 친일지주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미군정은 일본인 재산을 접수한 뒤 친일파나 친미파에게 당시 시가의 1/10의 가격으로 넘겨주었다.
경제의 파탄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미곡정책의 실패로 식량을 수입하는 한편 일제시대와 똑같이 곡물을 강제공출했고 생필품의 폭등 등 물가지수가 평균42배 상승하면서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국제신문 1948년 8월 15일자 <각 방면에 끼친 군정 3년의 영향>기사는 “군정하 일반 행정부면에 있어서는 무엇을 남겨 놓았는가. 돌이켜 보건대 일제의 착취를 근본으로 한 행정기구가 다소의 변경이 되고는 그대로 존속되고, 변경되었다는 것은 사무계통을 도리어 마비시키고 말았다. 민생문제에 직접 관련되는 근본적인 부면에 대한 개편은 없이 다만 고식적인 사무처리와 이와 아울러 명령계통이 서지 못하여 조금만 서두르면 해결할 문제도 그냥 묵살되어 버리는 것이 3년 간의 행정의 전부였었다.”며 미군정에 대한 국민들의 광범위한 불만을 전하고 있다. 이어 “악독스러운 왜정 하에서는 식민지정책 강행에 따라 식량이 일제에게 매년 7, 8백만 석이나 박탈당하여 굶주렸다고 하겠으나, 해방 후 “이제는 넉넉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또 희망에 찼던 식량 문제가 朝夕걱정만 계속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라고 미군정하 식량정책의 실패를 지적하고 있다.
미군정에 대한 실망과 함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의 보도를 통해 신탁통치결정이 알려지면서 신탁통치를 놓고 찬탁과 반탁으로 국론은 갈라지게 된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반탁입장이었으나 소련이 신탁통치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찬탁으로 입장을 바꿨다. 해방 후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일제강점기 친일과 반일이라는 대립구조는 좌우익의 대립구조로 그 모습을 바꾸게 된다.
횡성도 예외없이 좌익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바꿨고, 우익단체도 찬탁과 반탁을 번복하며 각종 집회가 이어져 아침저녁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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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년12월 모스크바3상회의(미국, 영국, 소련)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독립국가 건설을 기대했던 국민들의 불만과 항의가 잇따랐다. 친일파와 지주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지지자가 별로 없었던 이승만은 신탁통치반대를 내걸며 친일파척결을 반대했던 자신의 불리함을 피해갔고, 소련의 결정에 맞춰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바꾼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했다. 신탁통치결정은 찬탁(좌익)과 반탁(우익)으로 국론을 분열시키며 극심한 좌우대립을 가져오게 된다. 사진은 신탁통치결정에 항의하는 시민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
사회주의사상, 민족의식 강했던 횡성
소작인들의 토지분배요구, 우익단체와 충돌
해방 후 횡성은 교육자동맹, 청년수양동우회, 무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횡성청년연맹, 대동청년단 등 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 사상과 민족의식이 강했던 횡성은 해방 후 민청에 가입된 이들이 8할일 정도로 좌익세가 강했다. 좌익활동이 불법으로 간주되던 46년 12월에 농민조합 주최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와 남로당 결성 축하 군민대회>가 횡성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렸을 때도 2천명이 모였다고 기록이 전한다.
해방 후 횡성에는 지주와 상업으로 돈을 번 토착부호들도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소작농이었던 대다수 군민들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특히 북천리에 소작농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해방 후 토지분배를 주장하던 이들이 소작인들에게 지장(손도장)을 받으러 다녔다고 한다. 소작인들은 대부분 글씨를 모르는 문맹이었다.
그런데 이를 경찰이 알고 서북청년단이 개입하면서 충돌을 빚었다. (서북청년단은 월남자를 중심으로 1946년 11월 30일 조직된 반공주의 청년단체로, 횡성에서는 주로 운전수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
김동수(76세. 횡성읍)씨의 할머니도 토지분배를 찬성하는 지장을 멋모르고 찍어줬다가 큰아버지와 고모네까지 서북청년단에 붙들려갔다고 한다. 소 한 마리를 갖다 바치고야 겨우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 그때 서북청년단이 진짜 못되게 했어. 지금은 언론이라도 있지만... 지장 찍은 사람들을 지금 롯데리아 이층 건물인 사무실로 붙잡아갔어. 두드려 패 내쫓으면 가서 줏어다가 살리고... 돌싸움은 그 연장선에서 볼 수가 있지.”
김동수씨가 기억하는 돌싸움은 1948년 8월 15일 서북청년단들과 지장을 찍어줘서 빨갱이로 몰려 화가 난 소작인들 사이에 벌어진 돌싸움이다. 군청뒷산과 천주교성당 뒷 동산에서 돌싸움이 벌어졌다고 한다.
“여자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여름이지. 지금 화염병 던지는 거랑 똑같지 뭐. 양쪽이 몇 십 명씩...”
김동수씨는 나중에 돌싸움이 끝난 뒤 소작인들 중에서 경찰에 잡혀가거나 조사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억했다.
양측의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제1대 횡성군수였던 방흥범씨의 사례로도 가늠할 수 있다. 해방이후 횡성에 들어온 미군정은 지금의 구릿고개에 있던 일본인 호텔에서 묵었다고 한다. 당시 통역을 했던 이는 횡성에서 존경받았던 민족주의자 방흥범씨. 방흥범씨는 4개 국어를 능통하게 했고, 횡성군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손수 지게를 지고 다닐 정도로 농업정책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와 8.15 돌싸움과의 관련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후 좌익으로 몰려 서북청년단에게 심한 린치를 당하고 가마니에 덮힌 채 버려졌다고 한다. 김동수씨는 미군 수사본부가 ‘통역을 해준 사람을 왜 이렇게 했냐’며 방흥범씨를 구해주었다는 이야기를 어린 시절 어른들께 들었다고 한다.
| ▲ 제1대 횡성군수 방흥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 건국자치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사진/ 횡성군청 홈페이지 |
돌싸움을 전후로 횡성에서도 횡성경찰서를 비롯해 관공서가 습격당하는가 하면, 반대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에 의한 폭력사건도 벌어졌다. 1946년 10월 18일에는 많은 군중들이 횡성경찰서를 비롯하여 도내 세 곳을 습격했고 47년 8월 10일에는 횡성우체국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인민군 20명을 포함한 80여명이 48년 11월 7일 북한 양양에서 남하하여 원주 8연대와 원주경찰서를 습격하려다가 발각되어, 원주경찰대와 교전이 있었고 태기산에서 충돌해 경찰 두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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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삽교리 양구두미재에 세워져 있는 경찰전적비. 1948년 11월 북한군과의 태기산일대 전투에서 희생된 경감 곽윤춘, 경위 양명석과 1949년 7월 강림지서를 공격한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경위 김한석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진/ 횡성군청홈페이지 |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날 벌어진 돌싸움이나 1대 군수를 했던 횡성의 존경받던 민족주의자가 초죽음을 당하는 사건, 돌싸움을 전후로 한 좌우익간의 크고 작은 충돌들은 횡성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리고 첨예한 이념대립을 낳았던 해방 후의 갈등은 이후 한국전쟁 동안 더욱 불행한 모습으로 가시화되어진다. <이용희기자, 오숙민객원기자>
※6.25전쟁을 겪은 횡성주민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관련 사료들을 통해 전쟁 당시 횡성과 횡성사람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지만 그 어떤 말로도, 세밀한 글로도 전쟁을 온 몸으로 받아냈던 이들의 기억과 아픔을 담아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온전히 횡성희망신문의 부족함 탓이다. 기꺼이 기억을 풀어내어 주신 분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용희 기자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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