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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횡성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3)무더웠던 1950년 여름...뒤바뀐 세상
이용희 기자 | 승인 2015.07.08|(0호)

 

  6.25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흘렀다. 전쟁으로 생겨난 장벽(障壁)은 길고 깊은 시간을 지나 넘을 수 없는 거대함으로 지금 우리 곁에 있다.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장벽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내일을 향해 가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횡성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어보는 이 특별기획은 이 물음으로부터 출발했다.
<편집자 주>

 

▲ 1950년 5월 6일 횡성초등학교 제36회 졸업사진. 초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고 채 두 달이 되지 않아 6.25전쟁이 시작됐다.


-6.25전쟁 초기, 국군이 다시 횡성을 수복하기까지의 여름전쟁은 국군이 쫒겨간 이후 첫 인민군 치하였다. 징집을 피해 젊은이들은 몸을 숨겼고 서둘러 딸을 혼인시키기도 했다. 곧 끝날 줄 알고 가벼운 짐만 챙겨 가까운 시골로 피난을 떠났던 전쟁은 만 3년이 지나서야 끝났다. -

 

 불행한 전쟁의 조짐은 미리부터 보였다. 1950년 6월 이전까지 남북 간에는 부분적인 무력충돌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곤 했다. 친일파와 반공세력을 기반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공공연히 북으로 쳐들어가 조국을 통일시켜야 한다며 ‘북진통일론’을 주장했고, 반대로 북한 김일성은 미군을 몰아내고 남한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조국해방’을 주장했다. 

 김동수(76세.횡성읍)씨 부모님이 하시던 식당에 손님으로 자주오던 기동대원 김씨(당시 20대 초반)가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얘기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평북 강계 사람인 김씨는 1949년 월남할 때 인민군 군대와 장비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걸 보았다는 것이다. 김명수 6.25참전유공자회 횡성군지회장도 2012년 횡성희망신문의 회고록 <악몽의 전쟁, 6.25회고>에서 1950년 3월경 북한군이 병력을 38선으로 전진배치하고 북한주민을 5km후방으로 이주시키고 있다는 것을 당시 국군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 6.25전쟁발발을 알리는 1950년 6월 26일 동아일보 조간 신문 기사. 기사는 “우리 정예 국군장병이 요격하여 긴급 적절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며 “전 국민은 안심하고 국부적 전황에 동요하지 말라”는 정부의 발표를 전하고 있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분단반대와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던 이승만과,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려했던 김일성이라는 두 지도자가 키워갔던 ‘전쟁’의 불씨는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옹진에 대한 포격을 시작으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옹진과 개성, 춘천 국경을 넘으며 만 3년 1개월 2일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소풍가듯 여름피난 떠난 12살 소년
학습과 인민재판 이어진 피난살이

 전쟁이 일어나자 김동수씨 가족은 곧장 서울 경동학교를 다니던 형을 내려오게 해서 6월 28일쯤 원주 호저면 영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우리가 전쟁이 난 걸 라디오로 듣고 먼저 알아가지고 이웃들한테 빨리 피난가자고 했지. 여름 피난 때는 큰집하고 같이 안가고 우리 식구들만 갔어.”
  피난길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12살이었던 소년 김동수는 가방을 메고 마치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고 한다.
 “가방 매고, 짐도 많이 안 갖고, 잠시 외가가 있는 촌에 갔다가 돌아올 줄 알았지.” 

 6.25전쟁이 나서 국군이 다시 횡성을 수복하기까지의 시기를 횡성 사람들은 여름 전쟁, 여름 피난 시기라고 부른다. 전쟁 초기에 사람들 대부분은 전 국토를 휩쓰는 전면 전쟁으로 확대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곧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기에 가까운 시골로 피난한 이들이 많았다. 횡성읍 사람들 중에는 갈풍리로 해서 원주시 호저면으로 피난한 이들이 꽤 되었다고 한다. 김동수씨의 이웃 세 집과 다른 서너 집도 그 곳으로 갔다. 

 소풍가듯 집을 나섰던 어린 김동수 소년에게 여름 피난시절은 인민군의 교육과 집 일꾼이던 김 씨의 변신으로 기억된다.
 인민군들은 소년 동맹, 청년 동맹, 여성 동맹이라 하면서 매일 같이 학습을 시켰다. 12살 소년 김동수도 칠월 하순 여름 볕 아래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있는 ...”으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젊은이들은 인민군에 징집됐다. 피난을 살던 집 안주인인 박 씨가 인민위원장이었는데, 그는 자기 동네 청년들과 피난 온 젊은이들을 숨겨주었다. 박 씨가 산에 땅을 파고 섶 가지를 쌓아놓고 구멍에다 감춰준 덕분에 젊은이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횡성과 원주가 국군에 수복된 뒤, 박 씨는 원주 경찰서에 부역혐의로 잡혀갔지만 그때 신세진 사람들이 진정서를 내서 풀려나왔다고 한다. 

 박 씨처럼 겉으로는 인민위원장이지만 사람들을 돌보아준 경우도 있지만 집안 일꾼이었던 청년 김 씨처럼 변신한 경우도 있었다. 김씨는 48년 8.15일 횡성 돌싸움 때 동네사람 편을 들어 돌을 날라준 것 때문에 서북청년단에 맞고 경찰에게 성기를 불로 지짐 받은 몹쓸 고문을 당했다. 그는 원주 피난지에서 말을 타고 다니며 인민군들에게 경찰 가족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야, 00야.” 부르면 ”네, 아저씨, 마나님” 이렇게 머리를 숙이던 사람에게 김동수 씨의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 모두 ”김 선생님“이라고 높여 불렀다. 

 전쟁 초기 국군이 퇴각하자 사람들은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대민사업을 잘 하는 인민군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산물을 일일이 통계내고, 사람들을 두드려 패는 걸 보고 그들을 나쁘게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민군들이 괜찮았는데, 자리를 잡으니까 젊은 사람들은 징집을 해가는 거야.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는 ‘뭘 했느냐.’ ‘반동 짓을 했느냐.’ 그러면서 두드려 패가지고 반은 죽다 살아나고 그랬어. 잘못한 것은 없는데 죽을까봐 어른들은 노심초사했다고... ”(김동수)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나섰지만 하루아침에 뒤바뀐 세상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고난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딸자식 끌려갈까 난리 통에 혼인
몸 아픈 덕에 인민군 징집 피하기도


  이런 저런 이유로 횡성읍에 남았던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횡성초등학교 근처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고 일곱 집이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전쟁 초기, 인민군들이 횡성초등학교 옆의 국군이 쫓겨 간 부대에 많이 들어왔지만 여름 전쟁이 끝나기까지 동네에는 피난을 가지 않은 집도 있었다. 

 횡성초등학교 뒤쪽에 살던 최순분 할머니(85세)도 집과 개울 건너 갈풍리를 오가며 여름 전쟁을 겪었다. 21살 새댁이던 최 할머니는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두 살 위인 남편, 네 살 아래인 막내시누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지고 머리가 허연 시아버지는 피난을 가지 않겠다고 해서” 집에 남았다. 나머지 식구들은 산골인 갈풍리로 가서 며칠씩 있다가 집으로 오곤 했다. 집에 남은 시아버지가 보리도 베고 밀도 베고 감자도 캐는 등 농사를 지었기에 먹고 살았다고 한다. 

 

▲ 함정261척을 통한 집중함포사격이 있은 수 시도한 인천상륙작전 당시 서해의 한 해안모습


 할머니는 인민군들이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은 그때 몹시 아팠기 때문에 인민군으로 붙들려가지 않았고 새댁인 최 할머니가 인민군의 주민교육에 나가지 않아도 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징집을 피해 젊은이들이 몸을 숨기는 한편에선 서둘러 딸자식을 결혼시키는 집도 있었다. 우천면에 살고 있던 윤춘옥 할머니(83세. 횡성읍 청용리)는 전쟁이 나던 해 10월 초 결혼했다. 19살이었다.
  “나이 먹은 애들은 다 붙들어간다고 해서 우리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붙들려가는 것보단 낫다면서 남 주자고... 그래서 했어. 난리 통에 잔치를 하는데... 비행기는 왔다 갔다 하는데 아주 정신이 없었어.” 윤 할머니는 솜이불을 해갈 참도 없어 결혼할 때 그냥 솜만 가져가야 했다. 

  9월 15일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이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면서, 김일성은 낙동강 선까지 내려갔던 북한군에게 9월 23일 총 후퇴명령을 내렸다. 미군은 퇴각하는 인민군을 쫓아 비행기 폭격을 퍼부었다. 횡성에도 9월 말 경 시가지 폭격이 있었다. 6월 27일 휴교령으로 문을 닫은 횡성초등학교도 폭격으로 전소됐다. 잔디밭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목조건물이어서 피해가 컸다. 

 

▲ 여름전쟁 때(1950년 9월) 폭격으로 전소되기 전 횡성초등학교 모습. 1941년 2차 개축한 모습으로 현 운동장을 기점으로 동남향에 목조건물 9개 교실과 맞은 편에 목조건물 4개 교실이 있었다. 횡성초등학교는 10월 1일 북천리 공회당을 빌려 문을 열었다.


 국군도 횡성으로 들어왔다. 여름 피난을 간 사람들은 대부분 9월 말쯤에는 읍으로 돌아왔다. 횡성초등학교도 북천리 공회당에서 수업을 시작했다. 전쟁의 포화는 횡성을 지나 멀리 북으로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여름 피난을 다녀온 사람들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어찌어찌 살았던 사람들도 폭격의 잔해 속에서 가재도구를 건지고 논밭을 돌보며 전쟁 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갔다. <이용희기자, 오숙민객원기자>

 ※편집자/ 횡성초등학교가 폭격으로 전소된 시기에 대해 어르신들의 기억은 일치하지 않았다. 1950년 여름전쟁 때가 아닌 이후 겨울전쟁시기에 폭격으로 전소됐다고 기억하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횡성초등학교100년사>(2011년/횡성초등학교 발행)에는 여름전쟁 기인 1950년 9월 25일 폭격으로 학교건물이 전소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역시 어르신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횡성희망신문은 횡성초등학교가 전소된 시기를 <횡성초등학교 100년사>를 근거로 했다.

※6.25전쟁을 겪은 횡성주민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관련 사료들을 통해 전쟁 당시 횡성과 횡성사람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지만 그 어떤 말로도, 세밀한 글로도 전쟁을 온 몸으로 받아냈던 이들의 기억과 아픔을 담아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온전히 횡성희망신문의 부족함 탓이다. 기꺼이 기억을 풀어내어 주신 분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용희 기자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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