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피난을 늦게 떠난 사람들 중에는 중공군과 인민군의 진입으로 남쪽으로의 피난길이 막힌 경우도 있었다. 어렵사리 떠난 피난길, 18세가 넘는 젊은 남자들은 국민방위병으로 징집됐고 굶주림과 추위, 장티푸스와 싸워 살아남아야 했다. 총성만 없을 뿐 그 곳 역시 전쟁터였다.-
횡성에서 겨울피난을 늦게 떠났던 사람들 중에는 중공군의 진입으로 발이 묶인 경우도 있었다. 횡성읍 추동리 윤주영(78세)씨 가족은 동네에서 제일 늦게 피난을 갔다. 50년 12월 말, 점심을 먹고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횡성시장까지 가니까 인민군 차량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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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영(78세) |
“나는 그때 12살, 어렸지요. 원주 의관리에 누님네가 계셨어요. 의관리에 가니까 오후 네다섯 시가 됐는데 하마 해가 넘어간 거여. 어둡더라고요.
누님이,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애들 데리고 어디 가냐고 자고 가라고 해서, 밤에 자는데 중공군들이 쫙 내려와 깔린 거여, 아이고. ”
중공군의 진입으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윤씨네 가족들은 원주시 소초면 의관리 평장아치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누님이 구해준 집에서 저녁에 불을 때고 다 치우고 나니까 인민군이 들이닥쳐서 방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인민군하고 삼일 저녁을 같이 잤다.
“그 사람들은 어디 가서 묻었던 벼들을 끌어다가 디딜방아 있는데 대충 찧어다가 먹으맨 그랬어요. 그 사람들이 나가고 우리는 거기서 피난생활을 계속 했지요. 인민군, 중공군 아휴...많이 봤지요. 근데 인민군 장교들은 말을 타고 소대장은 머리를 안 깎고 길렀어요. 한 삼일 그들이 원주 쪽으로 나갔다가 일주일 만에 다시 후퇴하기 시작한 거여.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저쪽에서는 아군들의 포 소리가 나고, 인민군들이 이리 북쪽으로 들어오는 거지. 그래도 그때는 인민군들이 우리 민가들에게는 피해를 안 끼쳤어요.” 윤 씨는 1951년 2월에 인민군들이 소초 넘어서 산길로 쫓겨 들어가고 일주일쯤 있다가 국군과 미군들이 올라왔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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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당시 1군사령관이던 백선엽 대장은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투 중 사망한 네덜란드군대대장 오우덴중령을기리는 비석을 세웠다.네덜란드참전 및 오우덴중령추모행사 (왼쪽)추모행사에 참여한 주한네덜란드 대사(오른쪽).뒤에 보이는 것이 오우덴중령추모비. 횡성읍 태풍루앞 횡성군민의 종이 있는 자리에 있던 추모비는 공원을 정비하며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사진 횡성감리교회 |
겨울전쟁 동안 횡성지역에서는 뺏고 뺏기는 전투가 계속됐다. 횡성감리교회에는 중공군의 2월 공세에 부딪힌 한국군과 미군의 철수 엄호를 맡았던 네덜란드군의 대대 지휘소가 있었는데, 51년 2월 12일과 13일에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대대장 오우엔 중령이 전사하기도 했다. 수차례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침내 3월 4일 횡성이 수복됐다. 윤 씨 가족들은 국군과 음력 3월까지 의관리에 있다가 횡성으로 돌아왔다.
전쟁을 피해 길을 나섰지만 남자들은 어떻게든 병력으로 모집됐다. 당시 윤주영씨는 어린 나이라 무사할 수 있었지만, 18세에서 40세 전의 젊은이들은 중공군에 맞설 예비병력인 국민방위병으로 모집됐다. 사십 전후의 남자들은 군수물자를 메고 나르는 보급대로 끌려갔다.
윤 씨와 같은 마을에 사는 김동운(90세)씨는 창림초등학교 선생으로 일하며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겨울전쟁이 나자 인민군에게 붙들릴까봐 가족들보다 먼저 피난을 떠났다. 김씨는 멀리 경상남도 삼천포까지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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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운(90세) |
“ 내가 스물 댓쯤 됐나. 거기서(삼천포서) 국민병으로 들어앉았는데, 사람들이 열병으로 많이 죽었어요. ”
“나도 죽을 뻔했는데 어떤 할아버지 집에 있을 적에 할아버지가 이불을 뒤집어씌워놓고서 열어놓으면 큰일 난다고 덮어 주고 덮어 주고 그 덕을 많이 봤지요. 친구들이 와서 김도 사다 밥을 해먹이고 입맛을 돋과서 살았어요.”
국민병이 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시기였다. 그렇게 김동운씨는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50년 겨울부터 반강제적으로 모집된 50만 여명의 국민방위병은 예비 병력이었다. 그들은 전투는커녕 수송과정에서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갔다. 하루 한 덩어리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고, 가마니를 이불 삼아 혹한을 넘기면서 굶주림과 추위, 장티푸스가 국민방위병이 싸워야할 눈앞의 적이었다. 길바닥에 국민방위병들의 시체가 넘쳐났고 시신은 제대로 묻히지도, 가족들에게 인계되지도 않았다. 전쟁 중에 군 간부들이 국민방위병의 지원 자금을 부정 착복해버린 결과였다. 이런 상황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51년 4월 30일 국민방위병은 공식해산됐다.
한편 김동운씨는 아픈 몸이 낫자 삼천포를 떠나 거창으로 갔는데 ‘거창에 빨갱이들이 있다’ 는 말에 대구와 원주를 거쳐 횡성으로 왔다. 걸어오느라 남들이 다 돌아왔던 52년 음력 3월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당시 젊은 남자들은 국민방위병으로 다녀왔어도 영장이 나왔다. 김동운씨는 또다시 징집됐다.
“ 제주서 훈련받고 부산을 건너와서 서산에 있다가 서울로 왔는데 춘천으로 보내. 가평을 지나며 보니 일산에서 나오는 기차에 군인들이 전부 핏덩어리야. 그래서 아휴 큰일 났다. 이제 죽었다 했지. 그때 운전을 배워가지고 갔거든. 운전하려고 갔는데 교육계 조수를 하라는 거야. 난 골치 아프게 행정 안하려고 운전병으로 써 냈거든. 그런데 우리 동기가 운전하다가 죽었어. 정신이 번쩍 나잖아. 사무 봐야겠다고 했지. 그래서 원주, 춘천, 속초에서 수송부대 행정을 보다가 왔지.”
그는 전쟁 중에 살아남았고 6.25 참전용사가 됐다. 그러나 피난길에 나섰던 나머지 가족과 큰 집 식구들 중에서 아이들 넷이 홍역으로 죽었다. 김 씨의 아들 둘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상묵(86세. 추동리)씨도 국민방위병으로 징집됐다가 다시 군복무한 6.25 참전 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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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묵(86세) |
“ 툇마루가 있는데, 거기서 이불도 없이 자는데 온몸에 이는 들썩들썩 허지. 얼마나 이가 많았냐면 막 옷을 흔들었어. 병이 들어 하루 저녁에 네다섯 명은 그냥 죽어 자빠지는 거야.
여기 못있겠다 도망쳐서 바닷가를 돌아 댕기니까 또 붙들어가잖아. 붙잡혀서 도로 끌려간 거지.”
“ 51년 겨울피난 나갈 때 나는 21살인가. 국민병으로 갔지. 부산서 사뭇 있다가 인제 집에 가라고 해서 이듬해 가을에 집에 왔어, 한두 달 있다가 또 군대 갔잖아. 제주도서 훈련받고 금강산 예양이라는 데까지 갔어. 그런데 내가 병이 났어. 휴전되고 그해 겨울에 대전육군병원에 갔다고. 거기서 1년 있었어.”
맹장수술을 했는데 그게 터져서 복막염이 돼 다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젊고 건강했던 이상묵씨는 국민병 시절에도 주먹밥이 아닌 한 그릇씩 밥을 먹을 수 있었고 크게 고생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부산서 국민방위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봤다.
”우리는 밥을 먹었지만 못 먹은 데도 많아. 그런 델 가봤는데 사람이 백 명 이백 명 앉았고 드러누워 있는데, 저녁마다 죽는 게 말 다 못해. 걸음도 못하고 픽 쓰러지고 픽 쓰러지고...”
그때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인력동원이 된 적이 있었다. 부산의 산에다 갖다 묻고 묻은 자리에 이름만 써 붙였다고 한다.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어도 후방에서 굶주리거나 얼어 죽거나, 장티푸스로 숱한 군인들이 죽었다. 동료들은 그것을 지켜보거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을 뿐이었다. 김동운씨와 이상묵씨는 수없이 죽어가는 목숨을 봐야 했다. 총성만 없을 뿐 그 곳 역시 전쟁터였다.<이용희기자, 오숙민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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