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피난을 떠난 이들이 살아내야 했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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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피난길에 나선 최순분할머니는 짐싣고 가자며 국군이 남편을 데리고 갔다. 시어머니는 피난길에 돌아가셨다. 어린 시누와 피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남편은 포로수용소를 거쳐 3년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온 남편은 몇 달 뒤 다시 군대에서 3년을 보내야 했다. 사진은 군에서 제대한 남편과 찍은 사진. |
50년 12월, 횡성사람들은 서둘러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안전한 곳을 찾아 집을 떠났지만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거나,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겨울 피난을 떠난 횡성주민들은 낯설은 타향에서 사람들의 인정에 기대 살아갔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일 춘천을 탈환하면서 북진을 계속 했다. 퇴각하는 북한군을 밀어붙이며 진격한 국군은 10월 26일 압록강에 도착해 압록강의 푸른 물을 수통에 가득 담았다. 전쟁은 이제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10월 19일에 이미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던 중공군의 대부대와 혹독한 전투를 치렀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결국 12월 24일 함경남도 흥남에서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심상치 않은 전세(戰勢)는 월동준비에 여념이 없어야 할 횡성주민들에게도 전해졌다. 50년 겨울이 시작되면서 횡성주민들은 서둘러 남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횡성 사람들은 이 시기를 겨울전쟁, 겨울피난이라 부른다. 여름전쟁 때는 읍에 남은 이들도 있었고, 가까운 횡성읍과 원주시 외곽의 시골로 피난을 갔지만 겨울피난은 여주, 제천, 충주, 문경, 상주, 멀리는 포항까지 간 집도 있었다. 큰집, 작은집이나 같이 갔을까 제각각 집안 식구들끼리 떠나야 했고, 열 집이면 열 집 모두 피난 간 곳도, 겪었던 일도 달랐다. 전화(戰火)를 피해 나선 횡성주민들의 피난길은 살을 에는 겨울바람보다도 매서웠지만 사람사는 세상의 인정(人情)이 이들을 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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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려 채 녹지 않은 마을을 지나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행렬 모습. |
전쟁은 기어이 해를 넘겼다. 51년 1월 4일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서 다시 후퇴했고 다음날 횡성은 중공군에 점령됐다. 친척이나 이웃의 피난행렬을 보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피난길에 나서지 못했던 이들은 중공군에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횡성에서 고스란히 겨울전쟁을 겪어야 했다. 횡성주민들은 횡성에서 그리고 낯선 타향에서 1950년 겨울을 살아냈다
최순분(85세, 횡성읍) 할머니는 충주와 여주에서 겨울피난살이를 했다. 시아버지는 여름피난 때처럼 집에 남아있겠다고 고집했다. 최 할머니는 50년 12월 중순쯤 시어머니와 남편, 어린 시누와 같이 피난길에 나섰다. 그런데 문막에서 하룻밤 묵어갈 적에 일이 생기고 말았다.
“ 아군(국군)이 들어오더니 우리 영감님 보고 짐 좀 싣고 가자고 데리고 가더라고. 꼼짝없이 가야지 안갈 수 있어요? 음력 동짓달 말께 (양력 51년 1월 초) 됐을 거요. 영감은 그때 가가지고 3년은 소식이 없었어. 영감나이 스물넷인가 다섯인가...”
여름전쟁 때는 아파서 다행히 인민군으로 끌려가지 않았던 남편이지만, 겨울전쟁 때는 예비 병력인 국민방위군이나 보급대, 심지어는 군인으로의 징집을 피할 길이 없었다. 새댁은 군인들에게 남편을 뺏기고, 다시 피난길에 나섰다.
“ 충주서는 사랑방에 두 달 살았지. 횡성읍이랑 비슷한데 피난민들이 많았어. 집주인은 농사지을 준비도 하고 그랬지. 음력 동짓달에 가서 구정설(음력설.51년 2월 6일)도 거기서 쇤 거 같애. 눈이 하얗게 왔으니까. 좀 있다가 다시 여주로 갔지. 전쟁이 그때 좀 뜸했어. 여주서는 10일쯤 있었어.”
전쟁은 생각지 못한 불행들을 만든다. 시어머니가 시래기를 드신 뒤 급체했는데 약을 구할 수 없어 그만 여주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새댁은 어린 시누와 아무데나 땅을 파서 시어머니를 묻어드렸다. 시어머니는 나중에 전쟁이 끝난 뒤에야 모셔왔다.
최 할머니가 횡성읍으로 돌아온 것은 양력 4월. 불에 타거나 폭격에 무너진 집도 많았지만 다행히 최 할머니집은 무사했다. 집에 남았던 시아버지는 인근의 일곱 집 중 유일하게 기와를 올리고 방이 세 개인 큰 집을 지키며 오고가는 피난민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미국 군인들이 막 불싸지른다고 불을 가져다니면 우리 시아버지가 두 손을 모아 자는 것처럼 시늉허면서 여기서 자는 데라고 했대. 허리가 꼬부라지고 머리 허연 노인네가 그러니까 불을 안 쏴놨겠지. 다른 집은 이엉 엮은 초가집이라 우리 집만 하나 남았어 ”
시아버지가 전쟁으로부터 지켜낸 집에서 최 할머니는 이웃들과 한 달 쯤 같이 살았다. 이웃들은 불타버린 집을 치우고 대충 이것저것 엮어서 새 집을 지어 나갔다. 시아버지가 이웃들에게 덕을 베푼 덕이었을까. 전쟁이 끝나갈 즈음 남편 소식을 이웃사람이 신문에서 보고 알려줬다. 놀랍게도 남편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거였다. 가담리 개납이나 선돌마을에도 포로수용소에 갔던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었어. (남편이)가을 추수 전에 온 거야. 얼굴이 새까맣고 아주 빼짝 말랐던데 뭐. 우리 영감님 고생 엄청했어요. (피난길에) 국군이 잡아갔는데 다시 인민군에 붙잡혀가지고 이북 가서 한참 있다가... 여기(횡성)오려고 노력을 많이 했대. 산에서 막 기어와가지고 물을 사뭇 타고 왔다고 그러더라구. 그런데 포로로 잡힌 거야. 포로수용소에는 한 달쯤 있었는가봐.”
피난길에 잡혀가 천신만고 고생 끝에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몇 달 뒤 영장이 나와 다시 군에서 3년을 보내야했다. 시아버지는 아들이 군대 간 사이에 돌아가셨다. 전쟁은 새댁을 집안 가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남편도 집에 없고 시부모도 떠난 시댁에서 살림을 하며 시누를 거두고, 남편이 휴가 나왔을 때 생긴 아들을 키우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최 할머니는 “전쟁 때 하도 고생을 하고, 그 뒤로도 오래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며 웃으셨다. 30년 전에 돌아가신 남편과는 헤어졌던 날이 많아 같이 살아본 날이 적다며, 오래 전 일이 떠올라 눈가를 닦았다.
한편 김동수(횡성읍, 78세)할아버지 가족은 큰집 식구들과 함께 원주 양안치 고개를 넘어 피난을 떠났다. 열일곱명의 일가(一家)는 사람이 끄는 조그만 달구지에 먹을 것과 이불 따위를 싣고 그 위에 어린 아이들을 올리고 갔다. 인민군 탱크를 없앨 지뢰를 묻느라 국군이 파놓은 구덩이에 바퀴가 푹푹 빠졌다. 챙겨서 떠난 부엌살림도 거의 없었지만 피난길에 불을 땔 수도 없었다. 여름피난 때의 경험으로 요령이 생긴 터라 쌀을 볶아 맷돌로 갈아낸 가루에 조청을 섞어 만든 딱딱한 주먹밥을 갉아먹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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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도 상주까지 겨울피난을 갔던 김동수씨가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풀어내고 있다. |
하루 종일 걸어야 15Km, 수안보를 지나 문경새재를 넘어 문경탄광 왕릉이라는 데를 갔다. 고개를 넘을 때 아이들과 여자들은 조령 산길로, 어른들은 수레를 끌고 국도로 갔는데, 국도는 좁고 피난행렬까지 몰려 군인차가 다니지 못하면 군인들은 피난민의 수레를 뺏어 길밖 낭떠러지로 떨어트리기도 했다.
가다가 낡은 집이 보이면 탄가루 섞인 진흙으로 깨어진 구들장을 땜질하고 나무를 때면서 잤다. 땔나무를 하러 다녀온 큰아버지는 “사방천지에 맨 인민군 시체”라고 알려줬다. 며칠 만에 상주 함창으로 갔다. 달성 서씨 집성촌에서 엿을 고는 큰방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주인아줌마가 김 할아버지의 어린 두 동생이 홍역에 걸린 걸 알고 쫒아냈다.
“쫓겨나서 눈보라치는 처마 밑에서 떨고 있는데 수염이 난 털보아저씨가 오더니,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해. 사는 게 좀 괜찮은 거 같애. 저녁에 좁쌀밥을 주는 거야. 허기진데 얼마나 고마워. 아침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보니 그 집에 우리 동생처럼 돌백이 아기가 있는 거야.”
자식이 홍역에 걸릴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인심을 베푼 털보아저씨. 어린 두 동생들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던 피난 시절, 김 할아버지 일가는 그 집에서 석 달 동안 피난살이를 했다. 큰집은 털보아저씨의 친척되는 아랫집에서 지냈다. 김 할아버지는 그 때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 나중에 형제들과 찾아가 인사하고 몇 번을 더 찾아뵈었다고 한다.
전쟁 전에 식당을 하며 잘 살았던 터라 피난처 살이는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김 할아버지 어머니는 갖고 있던 밸벳옷을 함창 기생들에게 팔았고 큰아버지는 우연히 얻게 된 금덩어리를 팔아 두 집 식구들을 먹였다. 상주 피난살이 동안 국민방위군들이 숱하게 죽은 걸 볼 적마다, 혹시 피난 오기 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떠난 큰형이 아닐까 가족들은 애가 탔다.
김 할아버지 일가는 일찍 횡성으로 되돌아왔다. 연로하신 할머니와 오촌 당숙모가 북천리에 남아계셨기 때문이다. 돌아와 보니 횡성 시내는 폐허가 되어있고 폭격에 맞아 끊어진 뒷내다리를 복구하는 부대가 횡성시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교는 백인이었지만, 사병들은 모두 흑인들인 미군부대였다.
※6.25전쟁을 겪은 횡성주민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관련 사료들을 통해 전쟁 당시 횡성과 횡성사람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지만 그 어떤 말로도, 세밀한 글로도 전쟁을 온 몸으로 받아냈던 이들의 기억과 아픔을 담아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온전히 횡성희망신문의 부족함 탓이다. 기꺼이 기억을 풀어내어 주신 분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용희기자, 오숙민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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