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 치열한 육박전으로 횡성을 탈환했지만 원주시가지 진입을 눈앞에 두고 결국 봉산교를 폭파해야 했다.
김명수<6.25 참전유공자회 횡성군 지회장>


| 사진은 필자의 1949년경 헌병하사관학교 수료 후 임관초기 모습(왼쪽)과 최근 모습. |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2년이 흘렀다. 전쟁에 참여했던 당시의 젊은이들은 지금 80세를 훌쩍 넘었고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6.25전쟁 그리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에 대해 다양한 잣대가 존재한다. 이 회고록은 6.25전쟁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아니다. 6.25를 경험한 한 개인이 전하는 전쟁기간 삶의 궤적이다. 횡성이라는 이름아래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횡성인들의 삶을 통해 오늘 그리고 내일의 횡성을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편집자 주>
홍천 말고개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아군 2연대 19연대는 29일 밤 큰말고개 방어선을 포기하고 원주를 경유하여 신림 제천을 전선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7연대는 홍천과 삼마치에서 전선을 유지하다가 29일 밤 9시에 홍천 전선에서 횡성으로 진출하였다. 밤 10시경 횡성교를 지나 횡성 시가지로 진입하니 인민군 역시 횡성 시가지로 진입하고 있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기 어려운 밤이었다. 횡성 시가지에서 맞닥뜨린 아군과 인민군은 결국 육박전을 벌이게 되었다. 육박전에서 상대가 삭발머리인가를 기준으로 인민군인지를 판별할 수밖에 없었다. 1시간여 동안 횡성시가에서의 치열한 혈전에서 아군이 승리하고 인민군은 홍천 서석 방향으로 도망쳤다.
횡성을 탈환한 7연대는 원주 소초면 산악지대와 원주 위관리 오산까지 전선을 유지했다. 이 때 2연대 19연대는 원주를 경유하여 신림과 제천 경계에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7연대는 30일 소초면과 위관리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이며 원주시가지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원주 시가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헌병대로부터 헌병3명을 지원하여 원주시내 외곽의 제천 충주 간 삼거리에 헌병을 배치하여 아군 병력의 이동에 만전을 기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아군이 신림과 제천 전선 등 충주 전선으로 이동 배치하고 있었던 당시 원주시가지와 봉산동 능선에는 인민군 박격포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이때 사단공병대 상사1명과 사병5명이 헌병 초소에 도착하여 봉산교를 폭파하라는 사단장 지시을 받고 왔다. 인민군 탱크 진입을 막기 위해 봉산동 봉산교를 폭파하라는 지시에 따라 아군이 모두 안전하게 이동한 후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공병대원과 낙오병, 피난민들과 함께 충주를 향해 질주한 일은 지난 번에 기술한 바 있다. 안전하게 달래강을 건넌 뒤 피난민들을 충주시내에 내려주고 군인들은 소속 부대로 귀대시켰다.
우리가 연대본부 헌병대로 도착해보니 1대대는 문경재로 이미 진출하였고 1개 대대는 괴산을 향해 진출하고 있어 우리 헌병 3명도 같이 괴산으로 향했다. 괴산 소재지를 지날 무렵까지 인민군과 간간히 격전을 벌여야 했다.
한편 문경재로 진출한 아군이 인민군과 옥녀봉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아군 1소대장 한도선 중위와 사병 5명이 전사하였다는 무전 연락을 해왔다. 6사단 7연대 역시 함장과 상주에서 격전을 치르고 이동하여 낙동강을 지나 의성과 군위군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혈전으로 얼룩지 ‘피의 능선’의 흔적을 능선마다 볼 수 있었다.
7연대가 이동한 신령에서 의성으로 통하는 고갯길 우측능선은 팔공산 정상이 바로 남쪽 정면으로 보이는 최후의 방어선 최북단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치열한 혈전으로 아군 전사자와 중상자, 부상자가 수없이 발생했다. 우리 헌병은 아군 중상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신념으로 수송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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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은 6.25당시 낙동강전투 최후의 방어선 최북단이었던 신령전선에서 온몸으로 적을 막아낸 장병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경북 영천시 신령면 화남리 성환산성에 마련한 신령지구 전승비의 모습 |
김명수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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