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에서 서울 방향으로는 도로가 차단되어 동두천에서 의정부 쪽 능선으로 향하는데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오른쪽 앞발이 뜨거울 정도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2년이 흘렀다. 전쟁에 참여했던 당시의 젊은이들은 지금 80세를 훌쩍 넘었고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6.25전쟁 그리고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에 대해 다양한 잣대가 존재한다. 이 회고록은 6.25전쟁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아니다. 6.25를 경험한 한 개인이 전하는 전쟁기간 삶의 궤적이다. 횡성이라는 이름아래 함께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횡성인들의 삶을 통해 오늘 그리고 내일의 횡성을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편집자 주>

| 사진은 필자의 1949년경 헌병하사관학교 수료후 임관초기 모습(왼쪽)과 최근 모습. |
무사히 강을 건넌 우리 일행이 4㎞쯤 가다보니 아군인 미군 포병대가 이 청천강 능선너머로 포를 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군 포병대 근처에 이르자 미군 상사 1명과 사병 2명이 다가와서 소속을 묻기에 6사단7연대 헌병이라고 대답하자 미포병 사령관 실로 안내해주었다.
중령인 포사령관에게 거수 경례를 하니 앉으라며 의자를 내주었다. 사령관 앞자리에는 통역관이 있어 7연대와 중공군과의 그동안의 격전사실들을 설명하자 미 사령관은 고생이 많았다면서 악수를 청하고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당시 우리가 입은 낡고 해진 허름한 군복을 보더니 사령관은 상사에게 미군 군복과 군화를 가져오라고 하는 한편 먹을 것(미군c레이션)을 주라고 지시했다.
이때 본인은 사령관실에 있는 5만분의1 지도 현황판을 놓고 미 포병대에서 포를 잘못 쏘고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중공군 대군이 배치되어 있는 능선을 지나 엉뚱한 곳으로 포를 쏘고 있음을 알려주자 사령관은 즉시 사격위치를 수정하는 명령을 내렸다. 정확한 포격지점을 알려준 결과, 10분 만에 중공군이 포진해있는 능선을 향해 집중 폭격을 가할 수 있었고 중공군 수천명을 격파하는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우리에게 미군복과 내의, 군화를 지원해 준 사령관은 가장 가까운 2군단 헌병부대까지 갈 수 있도록 지프차도 지원해주었다. 우리 일행에 대한 사령관의 배려에 대한 감사함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군단 헌병부장에게 귀대 보고를 했다. 적의 전선을 뚫고 다시 국군에 합류한 우리에게 헌병부장은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하면서 “불사조처럼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나온 자랑스러운 헌병”이라고 격려해주었다. 이 때의 일로 나는 일계급 특진과 군단장으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헌병부장은 7연대 낙오병 집결지에 헌병이 파견되지 못하고 있다며 본인에게 헌병3명과 스코다차량 1대, 6인용 천막과 취사도구 등을 지원해 주어 덕천 연대 집결지로 파견했다. 그곳에는 낙오병 500명이 집결해 있었다.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헌병이 도착하기 전날 귀대하였다고 들었다.
이틀 후 군단으로부터 연대 보충 병력을 지원받아 재편성하여 전선에 배치하고 있을 무렵 미포병부대가 후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선이 불리해 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중공군이 진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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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은 1·4후퇴를 유발한 중공군 인해전술의 한장면 |
당시 7연대는 북창으로 이동하여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순천으로 후퇴하면서 격전을 벌였지만 아군 사기는 저하되었다. 제2선인 평양 모란봉과 평양시내에서도 2일간 치열한 격전을 벌였지만 대군을 투입한 중공군에 의해 아군은 신계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공군과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경기도 점곡과 연천, 동두천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고 2일간의 혈전에도 점곡의 아군 전선이 중공군에게 뚫리고야 말았다. 동두천에서 서울 방향으로는 도로가 차단되어 동두천에서 의정부 쪽 능선으로 향하는데 근처에 포탄이 떨어져 오른쪽 앞발이 뜨거울 정도였다.
쏟아지는 포격 속에 생사의 고비를 넘어 의정부 능선을 넘으니 미군은 서울 방향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도로에 서있는 내 앞에 미군 소령 지프차가 정차하더니 본인의 우측 발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미군 의무병에게 무선연락을 해주었다. 쏟아지는 포격을 뚫고 나오며 오른쪽 발에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미군의무병은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군화를 벗기고 상처 부위를 확인하고 치료해 주었다. 상처부위가 깊어 4바늘을 봉합하고 재치료한 후 붕대를 단단히 감았다. 이 위로 군화를 신은 나를 미군 소령은 지프차에 태워 경기도 곤지암의 아군 주둔지까지 안내해주고 돌아갔다. 미 소령의 호의는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김명수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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