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던 도중 포로로 잡혀 구사일생 탈출했던 일, 휴전직후 남북 간 유골교환의 업무를 맡았던 일 등 가슴엔 많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김명수<6.25 참전유공자회 횡성군 지회장>


| 사진은 필자의 1949년경 헌병하사관학교 수료 후 임관초기 모습(왼쪽)과 최근 모습. |
1951년 5월부터 인민군과 중공군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중공군 54만명과 인민군 24만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5, 6차 공세를 감행하였다. 중공군은 5월 18일 홍천강을 건너와 전략적 요충지였던 용문산 지구에 공격을 시도하였다.
중공군은 우리 6사단의 10배가 넘는 병력이었지만 6사단 2연대는 용문산에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해 강력한 공세를 감행하여 중공군을 격퇴시켰다. 2연대는 5월 20일 진지에서 나와 중공군을 향해 전면 공격을 감행하였고 6사단 19연대 7연대는 배후를 차단해 중공군을 역포위하는 새벽 기습 공격을 21일에 감행하니 당황한 중공군은 북한강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후퇴하는 중공군 3개 사단은 화천 구만리 발전소(현 화천발전소) 장악을 목표로 이동해갔다. 아군은 중공군의 퇴로를 봉쇄하며 강력한 총공세를 하여 중공군 2만5000여명의 전력을 전멸시켰다. 6.25전쟁 사상 단일사단 전투에서는 최대의 성과였다 이 전선에서 헌병상사였던 나는 헌병 3명을 인솔하고 용문산 용두리, 삼거리에 배치되어 아군진입로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중부전선 화천 구만리 발전소를 장악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공군을 상대로 전선이 오르내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아군의 강력한 봉쇄에 의해 중공군은 많은 병력 손실을 입고 화천 사방거리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 휴전이 될지 모르니 한 치라도 더 앞으로 진격해야한다는 명령이 내려왔고 아군은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혈전을 중공군과 치러야했다. 한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된 전투로 아군병력을 계속 보충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화천에서 병력보충의 임무를 맡아 중공군을 상대하던 중,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한반도에서의 포성은 일단 멈추어지게 되었다.
<휴전 그 이후 >
휴전 후 헌병 일등상사인 본인은 헌병3명을 인솔하고 북한강 최북단 38선(DMZ)에 파견되어 근무했다. 북한군과 서로 말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제대로 된 철조망도 없이 노란 줄을 쳐놓은 것이 당시 38선의 모습이었다. 이후 제1헌병대로 전속되어 제1헌병대 3과에서 근무하며 헌병학교 21기 범죄수사반(CID)에 입교하여 수료한 뒤에 6사단 7연대 헌병대와 5사단을 거쳐 예편하였다.
6.25 포성이 멎은 지 62년이 지났다. 종전이 아닌 전쟁이 멈춘 휴전 상태로 분단되어있는 세계유일의 국가로 전선을 가운데 두고 약100만 대군이 24시간 총성 없는 대기 상태로 62년을 흘려보냈다.
돌이켜보면 6.25전쟁은 골육상잔의 피의 전쟁으로 대한민국이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말살될 번 한 백척간두의 아슬아슬한 역사의 위기였다. 따라서 6.25전쟁의 비극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역사적 교훈을 저버리는 것이요 역사에 대한 죄악이다.
이제 본인은 사수(85세)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던 도중 포로로 잡혀 구사일생 탈출했던 일, 휴전직후 남북 간 유골교환의 업무를 맡았던 일 등 가슴엔 많은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부족하나마 이 회고록이 전후세대들이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의식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어 이 땅에서 더 이상의 전쟁을 방지하는데 기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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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병학교 동기생들과 서울 대방동에 있던 헌병학교 정문에서 찍은 졸업기념사진. (1950년 3월. 뒷줄 맨왼쪽이 필자) |
김명수 yongy6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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