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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만회 횡성희망신문대표 |
융통성 있는 자는 정체성과 염치 그리고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배려심이 있다. 하지만 기회주의자에게 이런 것이 없다.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한 횡성의 현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어느 날 땅에 사는 들짐승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이 싸움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이 싸움을 지켜보던 박쥐는 어느 편이 더 강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먼저 힘이라면 들짐승이 최고겠구나 생각되어 들짐승들의 대장 사자에게 자신은 귀와 코, 이빨이 있으니 쥐라고 하며 들짐승 편에 들었으나, 들짐승들이 불리해지자 이번에는 전략을 잘 짜는 새들이 이기겠구나 하는 생각에 새들의 대장 독수리 앞에 와서는 자신은 날개가 있고 날 수 있으니 새라며 새들 편에 섰다. 새들이 불리해지면 들짐승 편에 다시 들어가고, 들짐승들이 불리해지면 새들 편에 섰다. 결국 새와 들짐승들은 박쥐의 이런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치사한 술법을 알아차려 모두 박쥐를 쫓아내버리고 그 후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면 박쥐는? 혼자 동굴 속으로 들어가 틀어박혀 죽을 때까지 외톨이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솝우화의 박쥐 이야기다. 이 이솝우화의 교훈은 박쥐와 같이 비열한 행동을 했을 때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맞는다는 것이다. 과거에 박쥐는 필요에 따라 힘 있고 유리한 쪽으로 붙는 기회주의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부정적으로 평가됐다. 그런데 요즘은 이 박쥐에 대한 재해석이 나오고 있다. 다변화되고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는 현대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박쥐와 같은 융통성 내지는 임기응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솝 우화 속 박쥐가 과거에는 ‘기회주의자’로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면 요즘에는 ‘융통성 있는 자’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흐름도 있다는 것이다.
박쥐의 행위에 대한 평가가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기회주의자와 융통성 있는 자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박쥐 행위를 하더라도 기회주의자는 부정적으로 융통성 있는 자는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왜 그럴까. 기회주의자에게는 없고 융통성 있는 자에게는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융통성 있는 자는 정체성이 있다. 정체성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나만의 고유한 색깔이다. 개인적으로는 개성으로, 사회집단 속에서는 이념이나 신념으로 나타난다. 기회주의자들은 이런 정체성 없이 타인이나 다른 집단의 정체성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다.
또 융통성 있는 자는 염치(廉恥)가 있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반성할 줄 안다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는 이런 염치가 전혀 없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반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뻔뻔스럽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비도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 관념이 아예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회주의자들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일상화되어 있다.
융통성 있는 자는 공익을 생각할 줄 안다. 자신의 이익 추구 행위가 자신의 이익 증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나 공동체의 이익으로 연결되길 원한다. 하지만 기회주의자는 자신의 사적 이익이 우선이다. 자신의 행위로 타자와 공동체가 피해를 보더라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패 가름’이 심한 횡성에서 사람들은 “횡성에는 박쥐들이 많아”라고 자조 섞인 이야기를 자주한다.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힘 있는 쪽이 한정된 자원을 불공정하게 분배하는 환경 속에서 박쥐와 같은 행위가 만연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그러기에 군수 주변을 맴돌던 수많은 박쥐들이 군수가 뇌물수수혐의로 직위 상실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어디로 날아갈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지금 횡성의 박쥐들이 융통성 있는 자가 아닌 기회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정체성도 염치도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배려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기회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득세한 횡성이 사람 살기 좋은 곳일 수 없다. 횡성의 현실이 한심하고 부끄럽다.
조만회 hscham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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